자본의 탈을 쓴 부채 ① 위장자본

만기 1~5년짜리 채권으로 전락한 자본성 증권

2025-05-13 13:00:20 게재

“자구 노력 없이 쉽게 자본 늘려” … 기업 자본 질적 저하 심화

롯데손보 후순위채 상환 연기, 관례화된 차환 위기 논란 재점화

작년에 이어 올해 들어서도 금융사들의 자본성증권 발행이 급증한 가운데 보험사 후순위채의 조기상환(콜옵션) 이행 여부가 시장의 이슈로 떠올랐다. 롯데손해보험의 경우처럼 공모채권의 조기상환 불발이 쟁점이 된 사례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영구채라 쓰고 5년물이라 읽는다”는 말이 돌 정도로 자본성증권은 만기 1~5년짜리 채권으로 전락한 지 오래됐다. 자구 노력없이 쉽게 자본을 늘리는 기업과 금융사들로 인해 자본의 질적 저하는 심화한 상황이다.

◆영구채라 쓰고 5년물이라 읽다 = 13일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롯데손보의 후순위채 조기상환 연기를 계기로 자본성 증권의 관례화된 차환 위기 논란이 재점화됐다.

김상만 하나증권 연구원은 “자본성증권은 일종의 Capital Washing(위장자본)”이라고 꼬집으며 발행관련 제도 및 관행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성증권은 금융회사 자본규제상 자본으로 인정되는 채무증권을 의미한다. 발행조건에 자본 규제상 요구되는 자본적 특성(후순위성, 만기의 영구성, 이자지급의 임의성, 조건부자본 요건 등)을 포함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일반 자본성증권인 후순위채, 신종자본증권과 조건부자본증권인 코코(CoCo) 후순위, 코코(CoCo) 신종으로 구분된다.

한편 회계적 측면에서 자본성증권은 회계기준에 따라 자본으로 분류되는 채무증권을 의미하기도 한다. IFRS 하에서는 상기 4가지 유형 중 만기가 없는 영구적 형태이거나 만기 도래시 발행회사 선택으로 계약상 의무를 결제하기 위한 금융자산의 인도를 회피할 수 있는 조건인 신종자본증권과 CoCo 신종이 자본으로 분류되고 있다.

후순위채와 신종자본증권의 차이는 1차적으로 후순위 특약에 따른 채무 변제순위로 구분된다.

또한 신종자본증권은 후순위채와 달리 만기가 없는 영구적 형태이거나 만기가 있어도 발행자 선택으로 만기를 연장할 수 있고 발행자가 이자지급을 정지 또는 취소할 수 있어 자본성 정도 가 상대적으로 높다.

조건부자본증권과 일반 자본성증권의 차이는 발행조건에 예정사유 발생시 상각 또는 주식전환되는 조건부자본 요건이 포함되어 있는지 여부이다.

조건부자본증권은 부실금융기관 지정 등 예정사유 발생시 상각 또는 주식전환을 통해 우선적으로 손실부담이 이루어지므로 일반 자본성증권보다 자본성 정도가 높다. 조건부자본증권은 CoCo후순위 또는 CoCo신종의 형태로 발행되며, 조건부자본 요건 이외에는 후순위채와 신종자본증권의 차이와 유사하다

영구채는 만기 때마다 회사의 뜻에 따라 상환하지 않고 30년씩 연장해 나갈 수 있다. 원금을 갚지 않고 이자만 계속 물어도 되기 때문에 자본으로 인정해 준다는 이야기다.

영구채는 발행회사에 만기 전 중도 상환할 수 있는 권리, 즉 콜옵션을 부여한다. 거의 모든 영구채에는 조기 상환하지 않으면 가산 금리가 적용되는 ‘스텝업(step up)’ 조항이 있다. 최초 중도상환일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금리가 훌쩍 뛴다.

자본시장에서는 영구채 발행 회사가 중도상환일에 콜옵션 행사하는 것을 거의 불문율처럼 여긴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 자본시장도 마찬가지다. 영구채 발행 회사나 영구채를 인수하는 투자자 모두 계약 조건에 따라 만기 1~5년짜리 채권 정도로 생각한다.

시장 일각에서는 재무구조가 불안정한 기업들이 부채를 자본으로 둔갑시켜 사실을 은폐하는 데 악용할 가능성이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1~5년 후 상환 관례화 = 문제는 자본성증권의 발행구조에 있다. 후순위채권의 경우 통상 10년 만기에 5년 콜옵션 조건으로 발행되고 있으며 신종자본증권의 경우 영구 또는 연장 가능한 30년 만기에 5년 콜옵션 조건으로 발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간 관행적으로 콜옵션이 행사 가능한 첫 번째 기일인 발행 5년후 시점이 실질 만기인 것으로 투자자들 사이에 간주되고 그렇게 활용되어 온 측면이 강하다.

자본성증권이 보완적인 자본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구조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작용하고 있다. 첫 번째는 만기의 영구성이고 두 번째는 후순위성이다. 후순위채권의 경우 이름 그대로 유사시 선순위채권에 비해 상환순위가 후순위로 밀리는 특징으로 인해 일반 무담보채권에 비해 자본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고 신종자본증권의 경우 변제순위도 순위지만 만기자체가 없는, 그야말로 자본과 유사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자본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채권시장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콜옵션 행사조항은 이 같은 영구성에 따른 자본인정 효력에 의구심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 조항이다. 서정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아무리 자본으로 분류하라고 해도 부채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며 “이것이 투자자를 보호하는 방법”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자본성증권의 발행이 증가함에 따른 부작용은 또 있다. 많은 금융사들이 5년 콜옵션 조항으로 발행하는 수많은 자본성증권들은 반복되는 콜옵션 행사 여부 및 차환 발행 부담에 노출되게 된다.

평상시에는 차환 및 콜행사가 별문제없이 이루어지겠지만 거시적인 조달환경이 저하되거나 개별금융사차원의 경영상황이 문제될 경우 이 같은 차환리스크는 바로 점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 연구원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해서 코코본드 이외의 자본성증권의 발행과 관련된 제도 및 관행이 개선될 필요가 있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이른바 ESG에서 지적되는 그린워싱과 유사한 성격의 Capital Washing(위장자본) 논란은 앞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도 설령 옵션행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채권이 원래 그렇게 발행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편 김정현 한국기업평가 전문위원은 “신종자본증권 의존도가 크게 높아진 금융사들은 관례화된 조기상환을 감안하면 차환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금융시장 충격이나 신종자본증권의 리스크 부각으로 투자수요가 위축될 경우 양질 또는 동질의 자본 대체를 통한 조기상환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정현 연구원은 “금융회사 신종자본증권은 회계상 자본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조기 상환이 관례화된 점을 감안하면 경제적 실질과 자본의 지속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열위에 있는 자기자본으로 인식돼야 할 것”이라며 “보통주 자본 위주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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