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받고 선불유심 개통 허락 “처벌 대상”

2025-05-14 13:00:05 게재

1심 유죄→2심 무죄→대법 파기환송

“범죄 인식하고도 용인…미필적 고의”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대가를 받고 자기 명의 선불유심(USIM)을 수차례 개통해 줬다면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본인 명의의 선불유심을 개통할 때 그 유심이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알았거나, 적어도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될 가능성을 알았으면서도 용인한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70대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다시 재판하도록 대전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14일 밝혔다.

A씨는 2020년 12월 4일 대전 중구의 휴대전화 대리점 운영자 B씨로부터 “선불유심을 개통해주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선불유심 개통에 필요한 가입신청서와 가입사실 확인서약서를 작성한 후 신분증과 함께 제출해 B씨로 하여금 A씨 명의의 번호 유심을 개통하게 했다.

이후 2020년 12월 5일까지 B씨는 A씨 명의로 총 9회선의 선불유심을 개통했다. 이로써 A씨는 전기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전기통신역무를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그 대가로 B씨에게서 2만~3만원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선불유심이란 일정액을 먼저 지불하고 정해진 양의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으로 단기 체류 외국인 등이 주로 사용한다. 구입·폐기가 비교적 간편해 보이스피싱 조직이 타인 명의의 선불유심을 발급받아 범죄에 악용하는 일도 잦다.

실제로 B씨는 A씨를 비롯한 고객들에게 ‘실적이 부진하니 도와달라’고 부탁해 선불유심 7000개를 개통하고 이 중 일부를 보이스피싱 조직에 판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기통신사업법은 ‘전기통신역무를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하는 행위’를 금지하며 위반 시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심은 A씨에게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으나 2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선불유심을 개통해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하는 행위는 해당 선불유심이 범죄에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죄질이 좋지 않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A씨는 ‘휴대폰 대리점 실적이 부족하니 개통실적을 쌓는 용도로 선불유심을 개통하게 해 달라. 타인에게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B씨 말을 믿고 B씨를 도와주려는 단순한 호의로 선불유심 개통에 응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A씨를 처벌하는 게 맞다며 2심 판결을 파기했다.

대법원은 “A씨는 그 유심이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된다는 것에 대해 알았거나 적어도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될 가능성에 대해 인식하면서 이를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 즉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A씨가 재판 과정에서 선불 유심 1~2개를 개통해줬다고 인정했고 대가를 받은 점, 고령에 장애가 있더라도 인지능력에는 문제가 없는 점 등이 근거가 됐다.

이번 판결은 보이스피싱 등 전화금융사기에 자주 악용되는 선불유심 불법 유통과 관련돼 있는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실적을 위해 또는 단순 호의로 타인의 선불유심 개통을 도와주더라도, 그것이 범죄에 이용될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이를 용인했다면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될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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