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탈을 쓴 부채 ➁ 부메랑

재무 상황 악화 기업, 영구채 자본 확충 수단으로 활용

2025-05-15 13:00:27 게재

저 PBR … 신용등급 하향 등 기업가치 평가 악화

후순위·조기상환 미행사·이자 지연 등 투자 위험↑

국내 비금융 기업들의 신종자본증권(영구채) 발행 금액이 빠르게 증가했다. 국내 기업 전반의 실적이 저하되면서 재무 상황이 악화한 기업들이 영구채를 자본 확충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회계상 자본으로 인정되는 장점 덕분에 영구채를 대거 발행했던 기업들은 최근 딜레마에 빠졌다. 이는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저PBR(주가순자산비율) 등 오히려 시장평가 지표를 악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영구채 발행 후 기업들의 신용등급이 하향된 사례가 많았다. 고금리에 영구채를 선호했던 투자자들에게도 이젠 더 많은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영구채의 경우 일반 회사채에 비해 후순위 조기상환 미행사 이자 지연 등 고려해야 할 투자 위험이 더 높기 때문이다.

◆작년 6조430억원 발행 = 15일 한국예탁결제원과 한국기업평가에 따르면 국내 비금융기업 신종자본증권은 2012년 도입 이후 2024년 12월까지 12년간 110여 개의 발행회사에서 280여 건의 영구채를 발행했다. 2012년 최초 1조3000억원이 발행된 이후 2019년과 2020년에는 발행규모가 연 4조원으로 늘어났다. 팬데믹 이후 고금리에 따른 조달 비용 증가로 시장이 일시 위축되었으나 2024년에 들어 신종자본증권 발행이 빠르게 증가했다.

한기평에 따르면 영구채 발행 기업들의 평균적인 재무구조는 동종 업계 대비 열위한 수준이다. 주로 자본비용 절감, 절세 효과 등 다양한 경제적 유인이 있을 수 있으나 자본 확충을 통한 재무레버리지 개선이 가장 결정적인 발행 유인이다. 높은 금리 부담에도 불구하고 재무구조 보완 필요성이 큰 기업들이 지분 희석이 없는 자본 확충 수단으로 영구채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작년 비금융 기업이 발행한 영구채 규모는 일반회사채 5조3430억원, 특수채 7000억원으로 총 6조430억원에 달한다. 일반 기업들의 영구채 발행은 2023년 발행 1조1416억원보다 4.7배 더 늘었다.

특히 석유화학, 건설, 이차전지 등 업황이 크게 부진한 섹터를 중심으로 자본 확충을 위한 대규모 발행이 추진됐다. 상반기 SK인천석유화학과 신세계건설, SK온이 각각 4600억원, 6500억원, 5000억원의 대규모 신종자본증권을 잇따라 조달했다. 이어, 하반기에는 한화솔루션이 7000억원을 조달하며 단일물량 기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한화솔루션은 태양광·석유화학 부문의 동반 부진으로 2023년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며 부채비율이 212.1%까지 치솟자, 신용등급마저 위협받는 상황이 됐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지난해 8월 국내 비금융권 역대 최대 규모인 7000억원의 영구채를 사모 발행한 것이다.

롯데지주는 재무제표 건전성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해 총 3500억원 규모의 영구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11월에는 씨제이대한통운 2500억원, 12월에는 포스코퓨처엠이 6000억원의 영구채를 발행했다.

◆경제적 실질은 자본 아닌 부채 = 김종훈 한기평 선임연구원은 경기 둔화로 최근 신종자본증권 발행 빠르게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영구채 발행기업의 신용등급이 발행 후 하향된 사례가 많았다는 점이다. 김 연구원은 “국내 비금융기업 영구채는 회계상으로는 전액 자본으로 인정되나, 금리상향(Step-up)과 연계된 조기상환권 부여, 이자지급 누적 등으로 조기상환이 사실상 강제되고 있는 발행 구조상 그 경제적 실질은 부채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실제 대부분 영구채는 정책적 지원이나 인수합병 목적 등 일부 예외 사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구채는 조기 상환되고 있다. 비금융기업 영구채 발행구조는 금리상향 조항을 통해 발행기업이 조기 상환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경제적 유인이 설계되어 있다. 만약 조기상환권이 행사되지 않는 경우, 평판 훼손, 자본시장 접근성 제약, 추가 차입경로의 경색 등 큰 부작용이 예상된다. 때문에, 발행기업은 투자자의 기대와 시장의 관행에 따라 조기상환권을 행사하게 된다. 영구채의 최초 조기상환권 행사일이 실질 만기로 관례화된 현재 영구채 시장구조상, 최근의 영구채 조달액 증가와 가파른 금리상승 추이는 영구채 차환 리스크를 확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편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영구채를 발행해 온 기업들은 저PBR의 함정에 빠졌다.

영구채로 조달한 자금은 회계상 자본총계에 편입되므로, 기업의 순자산이 그만큼 불어난다. 반면 주가는 단기간에 변함이 없거나, 오히려 증권 발행 소식에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서 하락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PBR은 오히려 낮아지게 된다.

실제 한화솔루션은 지난 2023년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며 부채비율이 212.1%까지 치솟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지난해 8월 국내 비금융권 역대 최대 규모인 7000억원의 영구채를 발행했다. 그 결과 작년 말 부채비율은 187% 수준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2020년만 해도 1.5배를 웃돌던 한화솔루션 PBR은 0.29배로 추락했고 현재까지 0.67배로 대규모 순손실이 겹친 2023년에 0.8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일반 회사채보다 리스크 더 많아 = 영구채는 일반 회사채보다 리스크가 더 많아 투자자들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신종자본증권 투자는 일반 회사채에 비해 추가 고려해야 할 위험들이 많기 때문이다. 먼저 영구채는 후순위채권이다. 채무변제 우선순위에서 일반 회사채에 비해 하위에 있어 발행기업의 채무 불이행시 회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두 번째 위험은 조기상환 지연 리스크다. 스트레스 상황에 놓인 발행사가 콜옵션을 미행사하는 경우 투자자의 기대보다 원금 회수가 늦어질 수 있다. 마지막은 이자수취 지연 리스크로, 발행사가 신종자본증권의 쿠폰이자 지급을 임의로 연기할 수 있다. 김 연구원은 “일반적으로 영구채 투자 리스크가 현실화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면서도 “리스크의 현실화 여부가 투자자의 통제 범위 밖에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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