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0년 항해를 넘어 새로운 1000년을 향해
1996년 5월 31일, 바다의 중요성과 가치를 국민과 함께 되새기며, 해양 국가로서 도약을 다짐하는 ‘제1회 바다의 날’ 기념행사가 부산항 신선대 부두에서 개최됐다.
‘바다로, 세계로, 미래로’를 주제로 한 이날 행사는 대한민국이 해양강국을 향해 나아가는 뜻깊은 출발점이었다.
대한민국의 오랜 역사는 바다와 깊이 맞닿아 있다. 경남 창녕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약 8000년 전의 선박과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형상은 신석기 시대부터 바다가 우리 민족의 삶의 중심이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 바다를 둘러싼 치열한 주도권 경쟁을 벌였을 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과의 활발한 해상 교류를 통해 정치·문화적 영향력을 넓혔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해 동북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했다.
왕건은 해상 세력을 기반으로 고려를 건국했고, 고려의 국제무역항 벽란도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중심지로 아라비아·페르시아 상인들까지 활발히 드나들며 문물교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국제적 해양 활동 속에서 ‘고려(KOREA)’라는 국호가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민족은 바다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며 문화와 경제의 번영을 이루어온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해양 민족의 유전자를 품고 있다.
6·25전쟁으로 인한 남북분단으로 대륙으로 향하는 길이 막히면서 우리는 바다에서 살길을 찾았다.
이는 조선시대 해금(海禁) 정책으로 한동안 바다와 멀어졌던 우리나라가 오랜 해양 국가의 정체성을 다시 일깨우고 바다를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물류의 약 80%가 바다를 통해 이뤄질 만큼 해상운송은 글로벌 경제의 핵심 기반이 되고 있다.
바다는 물류를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압도적인 수송 능력을 갖춘 공간이다.
우리나라 해운회사 HMM이 보유한 세계 최대의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호는 6m(20피트) 길이 컨테이너 2만4000개를 한 번에 운송한다. 이 배에 실린 컨테이너들을 일렬로 붙이면 길이가 144㎞에 달한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이를 화물열차로 운송하려면 화차 50량이 달린 장대 열차 240개가 필요하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도 바다로 과감히 나아가 분투했던 해양인들의 땀과 노력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세계 대부분의 선진국은 바다를 끼고 있으며 그 바다를 지키고 활용하기 위한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바다에서 이룬 성과를 바탕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국가들에 대한 원조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조선 분야의 협력을 요청할 만큼 세계가 인정하는 발전한 나라가 되었다.
문화는 한 시대를 넘어 세대를 잇고 국경을 넘어 민족을 연결하는 힘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밝히며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국가상을 ‘문화의 힘’에 두었다.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은 해양문화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물론 전시와 교육을 통해 바다의 가치를 알리고 해양문화를 확산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렇게 배양된 우리의 문화적 역량은 우리나라가 세계 무대에서 리더쉽을 발휘하는 든든한 토양이 될 것이다.
오는 31일, 바다의 날이 30주년을 맞는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바다를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왔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퇴보하게 되는 것은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가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이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지난 30년의 항해를 넘어 새로운 1000년을 향해 항해를 시작할 때다.
우동식 국립인천 해양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