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에너지를 설계하라 ② 관리자 아닌 에너지 전략가가 필요
에너지를 둘러싼 세계의 담론이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1970년대 석유위기 이후 정책의 초점은 안정적 공급과 효율 향상에 집중됐고, 2000년대 들어서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친환경 전환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또 다른 문 앞에 와 있다. 에너지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규칙을 만들고 분배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바뀌고 있다. 에너지는 이제 산업과 무역, 금융과 안보를 관통하는 전략 자산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같은 자원이라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과 자격을 누가 설정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진다. 유럽연합(EU)은 ‘지속가능한 에너지 분류체계(EU 택소노미)’를 통해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특정 조건 아래 ‘친환경 투자 대상’으로 새롭게 분류했다. 단지 정의 하나로 자금 흐름이 바뀌었고 산업전략이 전환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그 자원이 어떤 제도 틀 안에서 어떤 이름으로 정의되느냐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조차 기술적 수치가 아니라 정치적 합의와 제도 설계를 통해 결정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탄소 회계 기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국가 감축공약 프레임 등은 각국 산업구조를 규정짓는 보이지 않는 협상장의 얼굴이다. 국제사회는 에너지를 무기화하고 있다기보다 정교하게 질서화하고 있다. 기후 청정성 안전성이라는 이름으로 규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싸움은 어떤 연료를 선택할 것인가보다 그 연료가 어떻게 읽히고 해석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일본의 녹색전환(Green Transformation·GX) 전략은 모두 기술 자체보다 이를 둘러싼 보조금 구조와 기준 정의의 선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잘 보여준다. 브라질은 바이오에탄올의 지속가능성 기준을 앞세워 시장 진입 규칙을 선점했고, 중국은 희토류 채굴과 정제의 환경 기준을 세계무역기구(WTO) 기술규제(TBT) 틀에 반영하려 시도해왔다.
기준을 제안하지 못하는 기술의 한계
한국은 여전히 기술력 확보와 효율 향상에 집중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국제 질서를 설계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가 수소다. 한국은 수소차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유럽은 재생에너지 기반 수전해 방식으로 생산된 수소만을 ‘그린 수소’로 규정했다.
이에 맞춰 우리는 ‘청정수소 인증제’를 도입했지만 기준을 먼저 제안하지 못한 기술은 시장의 규칙을 선점할 수 없다. 실제로 산업통상자원부와 국가기술표준원이 추진 중인 ‘수소 인프라 국제표준화’ 전략은 국내 기술의 글로벌 수용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응의 일환이며, 외교부는 기후변화대응과 연계한 ‘에너지기후 외교 포럼’을 통해 다자 협의 채널을 점진적으로 넓히고 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기술 대응’을 넘어 ‘기준 창출’로 나아가기 위한 전략의 구심점이 여전히 약하다.
한국은 에너지 기술은 준비되어 있으나 그 기술을 국제사회 안에서 어떻게 정의하고 어떤 구조 속에 편입시킬지를 설계하지 못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소형모듈원자로(SMR) 안전지침 △국제표준화기구(ISO)의 배터리 재사용 표준 △WTO 환경상품 분류 논의 등은 이미 글로벌 시장 판도를 바꾸고 있다. 그 틀을 구성하는 데 우리 손이 닿아 있지 않다면 우리가 만든 기술은 남이 정한 규칙에 따라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세계는 연료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중점
이제는 관리자보다 전략가가 필요하다. 독일은 외교부와 에너지청이 공동으로 ‘에너지 전환 외교관 프로그램(ETIP)’을 운영하며, EU는 ‘글로벌 게이트웨이(Global Gateway)’ 이니셔티브를 통해 제도 수출과 인재 양성을 병행하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에너지·기후 차관실을 통해 개도국 에너지 인프라 사업의 기준을 미국산 기술 위주로 설계하려는 외교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들은 기술보다 언어를, 수출보다 기준을 설계하고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빠른 적응이 오히려 지속적 종속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빠르게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기준을 제안할 수 없고 판을 만드는 자리에 올라설 수 없다. 우리가 제안해야 할 것은 데이터가 아니라 질서의 문법이다. △기후 대응 수단으로서의 에너지 △산업의 기반으로서의 에너지 △국가 외교전략의 지렛대로서의 에너지 등 이 세가지 속성을 통합적으로 조망하고 국제사회에 어떤 정의를 제안할지 국가 전략으로 명확히 정리할 때다.
자원 부국이 아닌 한국은 더 전략적이어야 한다. 양이 아니라 구조, 속도가 아니라 방향, 생산이 아니라 설계가 중심이 돼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에너지 기준은 재작성되고 있다. 우리가 그 문서의 첫 문장을 쓰지 못한다면 그 마지막 규칙은 남이 결정할 것이다. 에너지는 이제 단순한 자원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정치의 문법 속에서 작동하는 질서 설계의 코드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