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아메리카나’ 저물면 세계는?
트럼프 등장으로 “미국 쇠퇴” 진단 … ‘팍스 시니카’ 전망도
영원한 제국은 없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로마와 몽골 스페인 오스만투르크 영국 등 모든 제국들이 흥망성쇠라는 자연의 법칙만은 정복하지 못했다.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의 맹주인 미국이라고 예외일까?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80년간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였다. 초강대국 미국은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는 이상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America First)’을 외치는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면서 세계는 ‘미국 고립(America Alone)’ 조짐을 보이고 있다.
서방의 저명 학자들과 유력 언론들이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을 공공연히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의 힘이 이미 쇠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이 그동안 앞장서 세워온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정녕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는 종언을 고하는 것일까?
피케티 “미국, 세계 통제력 잃어”
‘21세기 자본’을 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최근 르몽드에 ‘미국 없는 세계를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the world without the US)’는 칼럼을 실었다. 피케티는 2003년에 시작된 이라크 전쟁과 러시아의 영향력 부활, 전 세계에서 저지른 미국의 군사적 오만 등을 거론한 뒤 “미국은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미국이 현재 “민주적인 견제세력 없이 불안정하고 변덕스러운 지도자 아래 혼란을 맞고 있다”고 걱정했다.
피케티는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2016년 미국을 따라잡았음을 주목했다. 현재 중국의 GDP는 미국보다 30% 이상 높으며, 2035년까지 미국 GDP의 2배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경제의 속사정을 들여다보자. 이른바 ‘쌍둥이 적자’로 불리는 미국의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는 심각한 수준으로 누적되고 있다. 지난 2월 미 상무부 발표에 따르면 2024년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9184억달러로 전년 대비 1335억달러(17%) 증가했다. 이는 사상 최대 적자 규모다.
미국 연방부채는 35조달러에 달한다. 지난 3월 미국 의회예산처(CBO)는 미국의 연방 부채가 오는 2029년 GDP 대비 107%까지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도달했던 최고치를 넘어서는 수치다. 피케티는 “국채 금리가 오르면 미국은 막대한 이자를 다른 국가에 지불해야 한다”며 “이런 맥락에서 트럼프주의 경제학자들은 미국채를 보유한 외국인들에게 지급되는 이자에 세금을 물리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피케티는 “트럼프주의자들이 이토록 잔혹하고 절박한 정책(brutal and desperate polic)을 추구하는 이유는 미국의 경제 침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며 “미국이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케티는 트럼프 대통령을 “좌절한 식민 지도자(a thwarted colonial leader)”로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짚었다. “과거 (제국주의 시대) 유럽열강들처럼 트럼프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한다. 세계가 미국의 은덕에 감사하며 바치는 조공으로 적자를 메우려고 한다. 문제는 미국의 국력이 이미 쇠퇴하고 있으며, 이 시대는 더 이상 이러한 잔혹하고 무절제한 식민주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팍스 아메리카나’가 해체된다면 세계질서는 어떻게 될까? 미국 없이도 세계경제가 돌아갈까? 학자들마다 전망은 갈린다. 세계는 미국 없이도 금방 새로운 질서를 찾을 것이라는 주장과 미국의 리더십에 익숙해진 세계는 큰 충격에 빠질 것이라는 견해가 대립한다. 어느 쪽의 주장이 맞을까?
아차리아 “포스트 아메리카 낙관”
먼저 낙관적인 전망부터 들어보자. ‘세계미래의 질서’라는 책을 쓴 아미타브 아차리아 아메리칸대 정치학 교수는 지난달 8일 뉴욕타임스(NYT)에 ‘포스트 아메리카 질서를 낙관하는 이유’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아차리아 교수는 “미국의 질서가 종식된다고 해서 반드시 혼란이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미국 중심의 질서가 어떤 나라들에게는 특별히 좋거나 공정한 체제가 아니었다”면서 “그런 질서의 종말이 더 포용적인 세상을 예고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아차리아 교수는 ‘팍스 아메리카나’는 서방 국가들만 혼란과 무질서, 불의로부터 보호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영국의 정치인이자 국제관계학 전문가인 에반 루아드(Evan Luard)는 ‘1945년에서 1984년 사이에 일어난 120건 넘는 전쟁 중 유럽에서 일어난 것은 단 2건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같은 기간 동안 벌어진 전쟁의 98%는 서방 이외의 국가에서 일어났다.”
아차리아 교수는 “여러 국가가 모여 만드는 ‘글로벌 멀티플렉스(global multiplex)’의 세계가 낙원이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보다는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팍스 시니카’ 시대 열릴 수도
낙관론을 하나 더 들어보자. 뉴욕매거진 부편집장을 지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월러스 웰즈(David Wallace-Wells)는 지난달 16일 NYT에 ‘중국 주도의 세계 경제를 상상한다’라는 칼럼을 실었다. 웰즈는 미국을 대신하는 세계질서의 새로운 수호자로 중국을 꼽는다. 그는 오늘날 지리경제학(geoeconomics) 흐름을 보면 중국 주도의 세계 경제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웰즈가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중국이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웰즈는 “미국과의 무역이 완전히 중단되더라도 미국 무역 상대국의 30%는 1년 이내에, 50% 이상은 5년 이내에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빠른 회복의 발판은 중국이다. 웰즈의 주장에 따르면, 25년 전만 해도 세계 10개국 중 8개국이 중국보다 미국과 더 많이 거래했지만, 오늘날에는 10개국 중 7개국이 중국을 가장 큰 무역 상대국으로 삼고 있다. 트럼프의 관세 때문에 많은 국가들이 미국 대신 중국과의 통상 협력을 늘리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크릴 “더 나쁜 것이 온다”
이제 비관론을 살펴보자. 미국 조지아 컬리지&스테이드 대학의 니콜라스 크릴 상법학 부교수는 최근 정치전문지 ‘더힐’에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 더 나쁜 것이 온다(Pax Americana is over. What comes next will be worse)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크릴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갑자기 종말을 고하고 있다”면서 “앞으로의 상황은 그 혜택에 익숙해진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시대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의도적으로 포기함으로써 끝나고 있다”면서 “미국은 체제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채 또 다른 이기적인 강대국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썼다.
미국의 보호막이 사라지면 당장 약소국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크릴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에 약소국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규범의 보호 아래 합리적인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서 “새롭게 부상하는 다극체제에서 이러한 국가들은 지역 강대국의 강압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세계 경제의 분열도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크릴은 “보호무역주의가 부상하고, 공급망은 국지화 되고, 경제적 효율성은 저하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전망했다. “세계 시장 통합으로 큰 혜택을 누렸던 최빈국들은 자본이 안전한 투자처로 빠져나가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부자나라들은 저렴한 노동시장으로의 접근이 차단되면서 생활수준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어느 쪽 전망이 맞을까? ‘팍스 아메리카나’가 유지되든, ‘팍스 시니카’가 새로 열리든, 한국의 국익을 지킬 수 있는 지혜를 찾아야 한다. 오는 6.3 대선에서 선출되는 지도자의 어깨에 그 무거운 책무가 얹힐 것이다. 지도자 한 명 잘못 뽑으면 내란으로 나라가 결딴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으로 제국마저 흔들릴 수 있다. 주권자의 한 표에 나라와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다.

칼럼니스트
지구촌 순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