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에너지를 설계하라 ③ 동북아 질서 재편과 한국의 선택
세계 질서는 거대한 구조 변동의 한복판으로 이동하고 있다. △기후위기 △에너지 안보 △공급망 충돌 △경제 블록화 등 복합적인 충격이 이중삼중으로 겹치고 있다. 동북아시아는 더 이상 국제정치의 변방이 아니다. 기술과 자원, 제도와 시장이 맞물리고 충돌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러한 지정학의 지각변동 속에서 러시아는 북극항로와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VSTO)을 통해 자원 수출 경로를 다변화하는 중이다. 일본은 ‘수소기반사회 로드맵’을 중심으로 호주·브루나이와의 블루수소 파트너십을 강화한다. 중국은 내몽고와 신장 자치구에 재생에너지 클러스터를 조성해 초고압(UHV) 전력망으로 대도시권과 연결 중이다.
이들은 그저 친환경 재생에너지를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기술 표준 보조금 정치규범을 포괄하는 ‘에너지 질서’를 재편 중이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몇 가지 기술중심 지표로 개별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데 머물러 있다.
한국은 유유자적 관망할 때가 아니다. 러시아·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북방지역과 남서 태평양을 넓게 끌어안는 해양, 대륙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중국, 전세계 무역량의 상당 부분이 지나다니는 아세안의 남방까지 우리와 무관한 곳은 하나도 없다.
한국은 이 네 방향으로부터 밀려오는 힘이 교차하는 전략적 중간지대에서, 더 이상 수동적 추종자가 아닌 질서의 설계자로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전략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첫째, 프레임을 먼저 짜라 – 협력 구조 재정립
에너지 안보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자원 확보를 정책의 최종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제도적 상호운용성과 공통 규범을 갖춘 협력 프레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청정수소 공급망을 완성하기 위한 ‘동북아 청정수소 회랑(Hydrogen Corridor)’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회랑은 호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수소 생산국과 일본·한국·중국 등 수소 수요국을 연결하는 공급망 체계이자 이동 경로이다. 한국은 이 회랑에서 저장·재기화·벙커링 기술을 보유한 핵심 거점국(Anker Country) 역할과 제도 조율자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다. 국가 전략 차원의 통합 인프라와 표준화 체계가 필요하다.
둘째, 기준을 선점하라 – 제도 설계 능력 확보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기준을 누가 먼저 정하느냐’다. 한국은 청정수소 인증제를 도입했고 암모니아·블루수소·그린수소의 빠른 산업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청정수소 및 암모니아에 대한 한·중·일·호주 간 상호인증체계로 확장하면 한국은 규칙을 만드는 ‘기준 설계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또한 유엔기후변화협약의 탄소상쇄 협력(Article 6) 체계하에서 상쇄 기준과 평가 틀을 제안하는 외교적 역할도 필요하다. 에너지를 넘어 기후 외교의 전략적 우위를 확보할 수도 있다.
셋째, 신뢰를 연결하라 – 조정자 국가로 도약
동북아는 유럽연합처럼 단일 시장도, 정치 공동체도 아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체계를 중재하고 연결할 수 있는 신뢰 받는 국가, 즉 ‘조정자 국가’가 필요하다. 한국은 △기술력 △제도 신뢰성 △투명성을 갖춘 국가로서, ‘동북아 에너지 협력 플랫폼’을 제안해 표준·보조금·탄소거래를 논의하는 중립적 대화 구조를 설계할 수 있다. 신뢰를 구축하는 국가는 결국 질서를 주도한다.
물론 이 모든 전략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벽도 분명하다. 동북아는 역사적으로 불신과 제도적 단절이 깊은 지역이다. 조정자 국가가 신뢰를 연결하려면 기술이나 제도뿐 아니라 지속적 외교력과 정치적 자본의 축적이 선행되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지금이 구조 전환의 희박한 기회의 창일 수 있다. 질서가 불안정할 때야말로, 새로운 구조가 수용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제는 기술보다 규칙, 속도보다 방향, 생산보다 설계가 더 중요한 시대다. 자원이 많지 않아도 질서를 설계할 수 있는 국가만이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 수 있다. 흔들리는 해류 위에서 방향을 묻는 것은 늦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새로운 항로를 설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글로벌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 교차점에 서 있는 한국은 질서를 만드는 나라인가, 남이 만든 기준에 적응하는 나라인가? 선택의 시간은 길지 않다. 이제 판을 짜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