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실용외교로 열어가는 새로운 한중관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한달 만에 전세계를 향해 쏟아낸 행정명령은 국제질서의 대전환을 예고한다. 미중 전략경쟁이 새로운 차원으로 격화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 외교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난 3년간 이념 편향 외교로 소원해진 한중관계를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실용외교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중국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 국가로서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협력 대상국이며 미국 시장의 축소분을 빠르게 상쇄할 만한 시장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국의 2대 수출국이자 자본 도입처로서 중국 역시 우리나라와의 정무적 경제적 관계개선을 희망하고 있다.
일부 세대를 중심으로 혐중정서가 퍼져 있다. 중국의 발전추세와 혐중정서는 일정 부분 궤를 같이한다. 이런 국민 정서를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한미동맹을 위해 중국을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한중관계를 신중히 다루려는 노력을 ‘대중국 저자세 외교’ 프레임에 가두어 버린다.
지난 2008년 봄 필자는 외교부 중국과장으로서 대통령의 방중 계기에 ‘한중 전략적협력 동반자관계’ 수립을 실무적으로 제안해 실현했다. 당시에도 이 제안에 대해 한미동맹 관계를 내세워 반대 목소리가 청와대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목소리는 지난 3년간 우리 외교를 다시 휘감았다. 이념 편향적 리더는 지나친 과거 지향과 편가르기로 국민을 피곤하게 했고 반성없이 상황을 탓하며 국익에 큰 손실을 끼쳤다.
이념 편향적 외교 국익에 큰 손실 끼쳐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이 국익을 위해 싸우면 약소국의 국익이 희생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극복하려면 스스로 힘을 키우고 전략적 자율공간을 확보해 진영과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유연한 외교가 요구된다. 이런 외교가 바로 ‘실용외교’다. 실용외교는 우리가 직면한 구체적 문제를 전문가 집단을 통해 정확히 진단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으며 상황에 적합한 문제 해결책을 개발하는 데 능력을 발휘한다.
필자는 문재인정부 당시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으로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북핵 수석대표들과 수없이 많은 접촉을 가졌다. 당시 미중 전략경쟁은 우리의 외교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미중 갈등의 파고 속에 북한 비핵화 문제가 실종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긴요했다. 우리는 북한 비핵화가 한국뿐만 아니라 미중 양국의 공동 이익이 걸린 사안으로서 호혜적 협력이 가능한 분야임을 강조했다.
한중 전략적협력 동반자관계는 북한을 포함한 지역과 국제문제에서 상호 심도있게 협의하고 협력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된 한중간 고위급 전략대화는 지금도 양국간 전략소통 채널로 가동되고 있다. 6월 4일 신정부가 출범하면 ‘한중 전략적협력 동반자관계’가 소기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양국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한국에서 개최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한중 정상간 만남이 예상된다. 양국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의 청사진이 나와야 한다.
미중 전략경쟁 시대에 한중간 협력은 내실 있는 호혜적 경제통상 협력에 초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난 2017년 사드 문제로 시작된 소위 ‘한한령’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 한중간 문화와 콘텐츠 분야 교류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한중간 자유무역협정(FTA) 서비스 투자 협상을 추진해 문화와 콘텐츠 산업 진출의 법적 제도적 비경제적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희토류를 비롯한 물질의 공급망 안정을 위한 한중간 협력 강화도 필요하다.
앞으로 우리는 트럼프행정부의 동맹정책과 한반도와 지역 정세에 따른 외교안보상의 다양한 변화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토대로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실현할 수 있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확대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성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용외교로 새로운 기회 창출해야
안보 딜레마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북중러와 관계도 개선해야 한다. 러시아와는 종전 과정에서 전략적 관계 재정립 방안을 모색하고 북한과는 북러동맹 등 변화된 상황을 고려해 새로운 남북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결국 이 모든 노력의 출발점은 중국과의 성숙한 관계 회복이다. 이념편향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실용외교로 한중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야 할 때다. 미중 전략경쟁의 격랑 속에서도 우리만의 항로를 찾을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절실하다. 외교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으로 단언하건대 실용외교만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