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섬백길 걷기여행 23 가파도 올레
지혜의 성채 ‘돌담’은 바람의 통로다
가파도는 바다와 거의 수평이다. 섬에는 산이 없다. 섬의 가장 높은 곳이 20.5m.
가파도는 모슬포항과 국토 최남단 마라도 사이에 있는데 우리나라 유인도 중에서 가장 낮은 섬이다.
가파도에는 제주올레 10-1코스인 가파도 올레길이 있다. 백섬백길에서는 59코스로 선정했다. 가파도올레는 상동포구를 출발해 냇골챙이 앞, 개엄주리코지, 큰옹진물, 가파 치안센터로 이어지는 4.4㎞의 길이다. 내내 바다를 보며 걸을 수 있다.
언뜻 보면 섬은 물에 잠길 듯이 위태롭지만 가파도의 사람살이 내력은 선사시대부터 시작됐을 정도로 유구하다. 가파도에서는 고인돌과 선돌을 비롯해 패총 공이 흠돌 돌도끼 적갈색경질무문토기 등 다수의 선사 유물들이 발견됐다.
고인돌은 57기로 제주 최대의 군락지다. 제주도에서 가장 큰, 길이 7m 무게 30톤의 대형 고인돌도 가파도에 있다.
가파도 사람들은 고인돌을 ‘왕돌’이라 부른다. 가파도의 왕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이다. 판석을 세우지 않고 지하에 묘실을 만든 다음 작은 굄돌을 놓고 그 위에 큰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왕돌의 나라. 고인돌은 지배자들의 무덤이다. 안타깝게도 이 손바닥만한 섬에도 그 옛날부터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어 살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가파도는 말 목장과 국가 제사에 쓸 흑우 목장이었다. 1751년에는 103마리, 1793년에는 75마리. 1823년 104마리, 1843년에는 72마리의 검은 소가 있었다. 1840년에는 영국 함선 2척이 가파도에 대포를 발포하고 흑우를 약탈해 가기도 했는데 이 사건으로 제주 목사가 파면됐다.
가파도는 조선시대 내내 주민 거주가 금지되다가 1842년 경작이 허가됐고 1863년부터 거주가 허가됐다. 19세기 후반부터는 일본 어민들이 가파도 바다의 전복을 싹쓸이 해 갔다. 1887년 8월 17일에는 가파도에서 전복을 채취하던 일본 어선 6척이 모슬포를 침략해 약탈을 일삼고 주민들을 살상하기도 했다. 1901년에는 가파도에 일본 어민 70여명이 살았다.
이때 이미 가파도는 욕지도, 거문도 등 남해안 섬들과 함께 일제의 식민 어촌이 되었다. 조선은 섬과 바다부터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 일제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섬과 바다를 등한시 한 후과는 조선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가파도에는 상동과 하동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하동 마을이 조금 더 크다. 상동과 하동 사이 들판은 온통 보리밭이다. 봄이면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
마을의 공동묘지는 상동과 하동 사이 북쪽 해안가에 있다. 묘지의 주인들은 끝내 평생 자맥질하던 바다를 떠나지 못하고 바다 곁에 누웠다. 가파도의 신당인 상동 할망당(매부리당)도 이 길가에 있다.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 선 가파도의 집담이나 밭담들은 외줄로 쌓은 돌담이다. 언뜻 튼튼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허술하기 그지없다. 돌담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어떻게 저 혼자 서 있기도 위태로워 보이는 돌담이 거친 해풍을 막아내며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저 숭숭 뚫린 구멍 덕에 돌담은 오랜 세월 바람을 막아낸 것은 아닐까. 돌담은 저 구멍으로 바람을 분산 통과시켜주며 바람으로부터 섬의 안전을 보장받아 온 것은 아닐까.
섬사람들이 쌓은 지혜의 성채, 돌담은 바람의 방어막이 아니다. 바람의 통로다. 섬사람들은 바람을 거스르고는 살 수 없어 바람이 지나갈 샛길을 만들어 주고 바람과 함께 살아간다.
백섬백길: https://100seom.com
공동기획: 섬연구소·내일신문
강제윤 사단법인 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