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치료제 가격 급등…생존연장은 ‘글쎄’
2000년 이후 FDA 승인 약물 절반 넘게 효과입증 못해 … 블룸버그 “신속승인 단점 드러나”
미국 밴더빌트대 암정책 연구원이자 약학박사인 스테이시 두세치나는 2020년 67세 모친이 ‘진행성 유방암’ 진단을 받자 유방암 치료제로 각광받는 화이자의 ‘입랜스’를 떠올렸다. 자기부담금으로 연간 약 1만달러를 내는 약이다. 암 치료를 보장하는 메디케어가 나머지 비용 대부분을 내게 된다. 당시 이 약의 연간 총비용은 16만달러였다. 최근엔 21만4000달러로 올랐다.
두세치나는 수년간 약값을 부담해도 모친의 생존기간이 늘어나거나 삶의 질을 개선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임상시험 결과 입랜스가 종양을 축소시킬 수는 있지만 환자의 생존기간을 연장한다는 증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입랜스는 시장에 출시된 지 5년이 넘었다. 두세치나는 “이 약이 돈 값을 할 것이라는 데이터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며 “결국 이 약을 사용하지 않았다. 정말 좌절스러웠다”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29일 두세치나의 사례를 전하며 “암 치료제 가격은 역대 최고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환자의 생존기간을 늘리지 못하고 있다”며 암 치료제를 집중 분석했다.
지난해 암 치료제는 전세계적으로 최소 2000억달러어치 팔렸다. 블룸버그는 “이는 비만약 규모의 10배가 넘는 수준으로, 제약업계에선 금광과 다름없다”고 전했다.
입랜스는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암 치료제 중 하나다. 시장에 출시된 뒤 10년 만에 화이자에 40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안겼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입랜스는 미국식품의약국(FDA)의 ‘혁신치료제’로 선정돼 신속승인을 받은 약물이다. 하지만 환자의 생존기간을 늘려주는 효과를 증명하지는 못했다.
FDA가 약물승인 기준을 완화하면서 지난 30년간 200개 이상의 암 치료제가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승인기준 완화의 단점이 명확해지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00년 이후 FDA 승인을 받은 암 치료제 절반 이상이 승인된 용도와 관련해 환자의 생존기간을 연장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암 관련 증상이나 삶의 질을 개선했다는 증거를 제시한 약물은 더욱 적었다. 블룸버그는 “제약사들이 지난 10년간 생존기간 연장을 입증하지 못한 암 치료제로 벌어들인 돈은 500억달러가 넘는다”고 전했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대 암센터 교수인 리처드 설리반은 “암 치료제가 엄청난 수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신화”라고 말했다.
반면 약값은 고공행진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암 치료제는 2000년대 초반 대비 4배 올랐다. 현재 새로운 암 치료제의 초기 한달간 비용 중앙값은 2만4600달러다. 컬럼비아대 암 연구자 티토 포조의 최신논문에 따르면 새로운 암 치료제로 연장되는 환자의 생존기간은 평균 3개월이다.
과거 주로 정부자금으로 지원되고 진행되던 암 치료제 임상시험은 이제 제약사들이 기획하고 조직하며 자금을 지원한다. 일각에선 이를 ‘암·산업복합체’로 부른다. 감독기관이 감독대상에게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FDA, 감독대상에게서 자금조달
1992년 미의회는 제약사가 FDA 예산의 일부를 부담하는 ‘수익자 부담금’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제약회사와 의료기기 제조업체가 FDA에 수수료를 납부하는 대가로, FDA는 임상시험 기간을 단축시키고 우선순위 약물에 대한 심사를 빠르면 6개월 내 완료하기로 했다. 이들이 내는 수수료는 FDA 연간예산에 절반에 육박한다.
1997년 미의회는 승인기준을 더 완화했다. 최소 2차례 ‘제대로 통제된 임상시험’을 거쳐야 한다는 요건 없이도 특정약물을 신속승인할 수 있도록 했다.
FDA가 신속승인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게 된 계기는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오른다.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HIV) 위기에 늑장대응한다는 비판이 비등했던 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02년 “관료조직인 FDA가 유망 치료제, 특히 암 치료제를 지연시킨다”며 ‘FDA, 환자들에게 죽으라고 말하다’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2000년을 전후해 유전학이 급속 발전했다. 연구자들은 암 성장에 관여하는 변이유전자를 식별할 수 있게 됐다. 제약사들은 여기에서 기회를 포착했다. 수년에 걸쳐 생존기간 연장을 입증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약물을 출시하는 법을 집중 연구했다.
2000년 국제 학계는 종양성장 측정을 위한 새로운 기준을 수립했다. 종양이 20% 이상 커지거나 새로운 종양이 나타날 경우 질병이 ‘진행된’ 것으로 보기로 했다. 반대 개념은 ‘무진행 생존율(progression-free survival)’이다. 종양이 악화되지 않은 채 환자가 생존해 있는 기간을 말한다.
제약사들은 이 개념을 적극 활용했다. 무진행 생존률은 실제 생존기간 연장을 입증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종양 성장률을 20% 임계값 아래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6~8주간의 검사기간 동안만 유지하면 오케이였다. 2000년대 중반부터 FDA는 종양 성장속도를 늦추는 능력을 기준으로 암 치료제를 승인하기 시작했다. 이 지표가 환자의 생존기간을 연장하는 약물을 신뢰성 높게 예측할 수 있다는 가정에서였다.
하지만 효과는 불분명했다. ‘유럽암저널’ 검토 결과 1999~2015년 고형암(덩어리를 형성하는 암)의 진행을 늦추는 것을 목표로 한 약물 임상시험의 2/3가 성공했지만, 환자의 생존기간을 예측하는 데엔 정확도가 낮았다. 실제 환자의 생존기간이 연장된 경우는 성공사례 중 38%에 불과했다.
제약사들은 또 다시 의회의 지원을 등에 업었다. 미의회는 2012년 ‘혁신치료제’법을 만들었다. 제약사가 FDA에 혁신치료제 지정을 요청하면, FDA는 60일 이내 이를 검토하고 후원사인 제약사들과 ‘피험자 수 최소화’ 등 가능한 한 효율적인 임상시험 설계법을 수립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캐나다 퀸즈대 종양하자 크리스토퍼 부스는 “이는 의료적 성과가 아닌 재정적 성공을 위한 지름길이 됐다. 핵심은 투자자들에게 더 빨리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라며 “종양 성장을 8주만 지연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환자의 생존기간이 연장되거나 증상이 개선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해당 약은 바로 수십억달러 약물이 된다”고 말했다.
이 법이 완전히 시행된 첫해 혁신적 치료제로 지정해달라는 신청은 90건을 넘었다. 그중 하나가 화이자의 입랜스였다. FDA는 165명의 환자가 참여한 임상시험 2상 초기결과에서 표준 호르몬 치료와 병용시 종양 성장 지연효과가 나타났다는 점을 인정해 2013년 4월 혁신치료제 지위를 부여했다. 입랜스는 2015년 2월 FDA의 신속승인을 받았다. 조건은 화이자가 2020년 11월까지 대규모 임상시험을 진행해 전체 환자의 생존율 데이터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단 종양성장만 억제하면…’
이 약물은 노바티스와 일라이릴리의 경쟁약물보다 2년 먼저 시장에 출시됐다. 입랜스 신속승인은 화이자에게 큰 이익을 안겼다. 2015년 10월 화이자는 암 치료제 매출이 54%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입랜스 매출은 2016년 21억달러를 돌파했다. 같은해 FDA는 다른 치료법에 반응하지 않은 유방암 환자에게 입랜스 사용을 추가 승인했다. 더 큰 규모의 임상시험이 종양 성장 지연을 입증하자, FDA는 2017년 신속승인을 완전승인으로 전환했다. 2020년 입랜스는 54억달러어치 팔려 회사 전체 매출의 13%를 차지하며 상위 3대 제품에 등극했다.
화이자는 2020년 11월까지 전체 생존률 데이터를 제출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반면 뒤늦게 시장에 진입한 일라이릴리 약물은 2019년 연구에서 다른 치료법에 반응하지 않은 유방암 환자의 생존기간을 연장하는 것으로 입증됐다. 2021년 노바티스 약물은 진행성 암의 초기 치료제로 사용될 때 생존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행성 암엔 그동안 입랜스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었다. 화이자는 2022년 666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임상시험 결과를 발표했다. 입랜스에 생존기간 연장 효과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비슷한 사례로 일본 다케다제약은 2015년 임상시험에서 골수암의 성장속도를 6개월 늦췄다는 결과를 바탕으로 1알에 4450달러인 다발성골수종 치료제 ‘닌라로’를 승인 받았다. 후속 연구들은 이 약이 환자의 생존기간을 연장하지 못했다는 결과를 보여줬다. 하지만 다케다는 이미 40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블룸버그는 “신속승인의 문제점은 제약사들이 약물의 실제효과를 입증하는 증거를 제시하는 데 시간을 끄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라며 “새로운 약물이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건 좋지만, 종종 그 희망은 결국 허망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 사이 제약사는 수십억달러 수익을 올린다”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