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탁 등기 전세사기, 무너진 신뢰 위에 다시 세운 희망
처음 전세사기 문제가 뉴스에 등장했을 때만 해도 필자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 생각했다. 직접 겪은 일도, 주변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었기에 그 고통을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천에서 근무를 시작하며 직접 전세사기 사건들을 접하고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문제의 잔인함과 구조적 불합리함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인천 지역에서 발생한 전세사기는 ‘건축왕’이라 불리던 남씨 일당에 의해 벌어진 조직적이고 정교한 범행이었다. 그는 대출로 다수의 주택을 신축한 뒤 이를 명의신탁자들의 이름으로 돌려놓았고 여러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설립해 자신과 연계된 중개사들을 통해 전세계약을 체결하게 했다.
주택에는 이미 선순위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었고 이에 의문을 제기한 임차인들에게는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겠다’라는 취지의 이행보증서로 불안을 덮었다.
이러한 조직적 사기 구조는 결국 무너졌다. 남씨가 임대보증금을 개인 사업에 유용했고 사업 실패로 대출이 연체되며 주택들은 경매에 넘어갔다. 하지만 임차인들은 경매에서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주택에 선순위 근저당이 있었고 채권액이 집값을 초과하거나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더 큰 절망은 형사재판에서 찾아왔다. 작년 8월 남씨 일당은 사기의 공소사실에 대하여 일부 무죄 또는 감형을 선고받았다. ‘편취의 고의’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
중개과실 있으면 손배책임 인정돼
이제 피해자들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길은 공인중개사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이었다. ‘공인중개사법’에 따라 중개인의 고의가 없더라도 중개과실이 있다면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될 수 있고 공제에 가입된 공인중개사라면 한국공인중개사협회(이하 ‘협회’라고만 한다)가 공제금 지급 의무를 부담하게 된다.
최근 필자가 대리한 한 사건에서 법원은 중개사와 협회의 공동 책임을 명확히 인정했다. 이 사건에서 임대차 목적물은 신탁 등기가 된 부동산이었는데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신탁 부동산에 대해 임차인이 대항력이나 우선변제권을 가지려면 반드시 수탁자의 동의 또는 사후승낙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임차인은 임대차계약 체결 당시 공인중개사로부터 신탁등기 사실 자체는 물론 수탁자 동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아무런 설명을 받지 못했으며 신탁원부조차 제시되지 않았다.
법원은 이러한 사정을 종합하여 중개인이 임대차계약 중개를 하며 임차인에게 임대차 목적물의 법적 위험을 충분히 고지하지 않은 것은 명백한 중개상의 과실이라고 판단했다.
더불어 협회는 해당 중개인의 공제계약에 따라 피해자에게 공제금 지급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협회의 과실상계 주장 역시 공평의 이념과 신의성실 원칙에 반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험 고지’는 중개인의 책임
이 판결은 전세사기 피해자들에게 단지 금전적 회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법이 아직 그들 편에 있다는 작지만 분명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협회는 항소했고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법원이 이들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 믿으며끝까지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 싸워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