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낙관적인 알츠하이머 치료제

2025-06-11 13:00:45 게재

이코노미스트지 “병리학 이해 향상, 표적 다양화, 기존 약물 재활용, 복합 치료전략 덕분”

세계보건기구(WHO) 알츠하이머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해당 질병 환자는 약 5500만명으로 추산된다. 2030년에는 약 7800만명, 2050년에는 1억3900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 중앙치매센터는 지난해 기준 65세 이상 인구의 약 10%인 90만명이 알츠하이머를 비롯한 치매를 앓고 있다고 추산했다.

과학자들이 직면한 의학적 난제 중에서도 치매의 가장 흔한 형태인 알츠하이머병은 특히 까다로운 문제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21년까지 민간 부문에서 알츠하이머 연구에 425억달러가 투입돼 140건 넘는 임상시험이 진행됐지만 병의 진행을 늦출 수 있는 약물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고 있다. 효과가 있는 치료제 2종이 시장에 출시됐으며 최근 발표된 연구논문은 조만간 더 많은 치료제가 등장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2025년 현재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한 182건의 임상시험에서 138개 신약을 테스트중이다. 이는 지난해보다 11% 증가한 수치다. 이 가운데 12개 신약은 마지막 단계인 3상 임상시험을 올해 안에 마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 신약들은 다양한 뇌의 생물학적 경로를 타깃으로 하고 있어 알츠하이머와 치매에 대한 분자 수준의 이해가 훨씬 정교해졌음을 보여준다.

지나치게 집착했던 아밀로이드 가설

알츠하이머 연구는 지난 수십년간 ‘아밀로이드 가설(Amyloid Hypothesis)’에 집중돼 있었다. 이는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 뇌에 축적되면서 신경기능 저하, 뇌세포 사멸, 신경염증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아밀로이드 가설은 가족 내 특정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알츠하이머의 조기 발병과 관련이 있다는 유전적 증거에 의해 뒷받침됐다. 2023년과 2024년에 각각 출시된 알츠하이머 치료제 ‘레카네맙(Lecanemab)’과 ‘도나네맙(Donanemab)’의 성공은 이같은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두 약물 모두 뇌에서 아밀로이드를 제거하는 효과를 보였다. 일부 환자에서 알츠하이머 진행을 약 30% 늦춰 삶의 질을 조금 더 오래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두가지 약물의 등장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지만 수십년 연구에 비해 성과가 너무 적은 게 아니냐는 실망감이 큰 것도 사실이다. 그간 아밀로이드에만 집착한 게 잘못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는 후회도 나온다”고 지적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인지신경학 교수인 제임스 로우는 “아밀로이드 축적이 알츠하이머의 주요 ‘초기 유발요인’이기는 하지만 환자가 실제로 병원을 찾을 무렵에는 다른 병리적 요소들이 더 빠르게 병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중에는 △타우 단백질의 기형 축적 △뇌세포의 대사 스트레스 증가 △염증 반응△뇌혈관 기능 저하 등이 있다.

미국 네바다대 라스베이거스 캠퍼스의 제프리 커밍스 연구팀은 이달 3일(현지시각) 발표한 논문에서 “알츠하이머에 대한 복합적 병리 이해가 마침내 신약 개발에 반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투자자들도 이에 동의한다. 2015년 세계 최초로 치매 치료제 전용 투자 펀드를 만든 영국 벤처기업 ‘SV헬스인베스터스’의 대표 케이트 빙엄은 “당시에는 알츠하이머에 대한 거의 모든 연구가 아밀로이드 단백질에 집중돼 있었다”며 “지금은 잠재적 표적이 다양해진 덕분에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에 훨씬 더 낙관적인 전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새로운 접근법에 기존약물 재활용도

현재 임상시험 중인 신약 중 약 1/3은 기존에 승인된 약물을 새로운 목적으로 재활용한 것이다. 이 방식은 이미 안전성과 독성 정보가 확보돼 있어 빠르게 승인될 수 있고, 개발비도 적게 든다는 장점이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약물 중 하나는 당뇨병·비만 치료제인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다. 항염증 및 대사 개선효과로 경도인지장애 치료제로 시험되고 있다. 수면조절 약물인 ‘피로멜라틴(Piromelatine)’은 뇌의 수면조절 호르몬인 멜라토닌과 세로토닌 수용체에 작용한다. 건강한 수면은 뇌 속 아밀로이드 및 기타 노폐단백질 제거를 촉진해 알츠하이머의 진행을 늦출 수 있다.

발기부전 치료제 ‘AR1001(미로데나필)’은 뇌 내 혈류 개선 및 신경세포 생존 경로 활성화 용도로 연구되고 있다. 항암 치료 환자의 구토 완화제로 쓰이는 ‘나빌론(Nabilone)’과 ADHD 환자의 주의력과 실행 기능을 개선하는 구안파신(Guanfacine)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불안 및 행동장애 치료 가능성을 놓고 시험되고 있다.

물론 용도 변경 약물이 새로운 표적을 가진 약물보다 후기 임상시험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보장은 없다. 케이트 대표는 “용도 변경이 아닌 새로운 분자 표적을 노린 혁신적인 약물이 알츠하이머 치료에 진정한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알츠하이머에 대한 최신 연구는 뇌 속 면역세포인 ‘미세아교세포(microglia)’를 주목하고 있다. 미세아교세포는 응급상황에 대응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잔해를 치우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기 때문에 뇌 속 소방관 경찰관 청소부로 묘사된다. 이 세포의 활동을 자극하기 위해 많은 약물이 미세아교세포 표면의 단백질 TREM2를 표적으로 삼아 알츠하이머 억제 가능성을 시험중이다.

약물을 조합하는 복합요법도 테스트 중이다. 항암제 ‘다사티닙(Dasatinib)’과 식물에서 추출한 항산화물질 ‘퀘르세틴(Quercetin)’을 함께 사용하면 노화 및 기능장애 세포를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암이나 HIV처럼 질병의 여러 경로와 구성요소를 동시에 겨냥하는 약물 조합이 알츠하이머에도 적용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여전히 존재하는 과제들

과거 연구의 일부 오류들도 수정되고 있다. 케임브리지대 로우 교수는 “아밀로이드에 치중했던 초기 연구는 아밀로이드 제거가 충분하지 않았거나 너무 느렸다”며 “임상시험의 대상 선정도 부실해 나중에 알츠하이머가 아닌 환자로 밝혀진 경우도 다수 있었다”고 말했다.

성이 뇌와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스위스 비영리단체 ‘여성뇌재단(Women’s Brain Foundation)’ 설립자 안토넬라 산투치오네-차다는 “오늘날 임상시험엔 성별 차이를 고려치 않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여성이 알츠하이머에 걸릴 확률은 2배 높다. 이는 단순히 수명이 길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이”라며 “알츠하이머 특정단계를 보면 타우 단백질이 남성보다 여성에 더 많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현 단계에서 관건은 조기진단과 데이터 공유라는 지적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기에 알츠하이머 검사를 받고 공동 등록 시스템을 통해 임상시험에 쉽게 참여해야 신약 개발이 더 빨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알츠하이머는 여전히 정복되지 않은 무서운 병이다. 하지만 병리학에 대한 깊어진 이해, 표적 다양화, 기존 약물의 재활용, 복합 치료전략 덕분에 과거에 없던 희망이 생기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희망은 커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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