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계 지갑이 닫히자 미국 기업들 휘청

2025-06-13 13:00:03 게재

단속 공포에 외출·소비 자제

코카콜라·홈디포 실적 타격

2025년 들어 미국 내 이민자 단속 강화가 라틴계 소비자들의 행동을 크게 바꾸면서 소비재 기업들의 실적에 직접적인 타격이 나타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현지시간) 미국 내 대형 소비재 브랜드들이 라틴계 소비자 지출 감소로 매출 하락을 겪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표적으로 코카콜라는 1분기 북미 판매량이 전년 대비 3%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코카콜라는 그 배경으로 ICE(이민세관단속국)의 단속 강화로 인한 라틴계 소비자의 위축을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실제로 히스패닉계는 미국 내에서 연간 약 2조1000억달러의 구매력을 가진 핵심 소비 집단이다. 이들은 평소 외식과 매장 방문이 활발했지만 최근에는 대면 소비를 줄이고 온라인 구매로 전환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칸타르’는 1분기 기준 히스패닉계 쇼핑객의 오프라인 방문이 홈디포(-8.7%), 월그린스(-10.5%), 달러 제너럴(-6.1%)에서 크게 줄었다고 분석했다. 이민자 단속이 활발한 지역일수록 변화 폭이 더 컸다. 플로리다주의 한 편의점은 2월 매출이 30% 가까이 급감했고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러한 변화는 불법 체류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시민권을 보유한 라틴계 이민자들까지도 외출을 꺼리고 있다.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귀화 시민 마누엘 마르찬트는 “밤에는 외출을 피하고 여권과 시민권 사본을 항상 소지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ICE 단속이 일상에 스며든 공포가 되어 소비를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라틴계 소비자 비중이 높은 브랜드들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콜게이트-팜올리브’, ‘윙스탑’, ‘엘 폴로 로코’ 등은 최근 실적 발표에서 라틴계 고객 지출 감소로 인한 매출 하락을 보고했다. 특히 ‘콘스텔레이션 브랜드’는 미국 판매의 3분의 2 이상을 멕시코 맥주 브랜드 '모델로와 코로나'에 의존하고 있다. 이 회사는 히스패닉 소비자 중 75%가 외식 빈도를 줄였다는 자체 설문조사를 발표했다.

소셜미디어 상의 소문도 소비 위축에 기름을 부었다. ICE에 협조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퍼지면서 일부 히스패닉 소비자들은 코카콜라 불매운동에 동참했다. 코카콜라 측은 이를 “완전히 허위”라며 부인했지만, 이미 불신은 퍼졌다. 소비자들은 SNS에 펩시를 고르는 모습을 공유하며 불만을 표현했다.

상황이 더 악화한 계기는 LA 지역에서 벌어진 ICE 단속과 그에 대한 시위였다. 트럼프 행정부는 시위 진압을 위해 주 방위군과 해병대까지 투입했고, 이후 공포는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특히 남부 지역의 이민 밀집 지역에서는 시민권자들조차 거리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슈 팰리스, 엘 폴로 로코 등 라틴계 타깃 브랜드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을 수정 중이다. ‘JD스포츠’의 CEO 레지스 슐츠는 “방문객이 급격히 줄었고, 이민 정책의 여파를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스턴 비어’는 음료 ‘트위스티드 티’의 판매 둔화를 히스패닉계 구매 감소로 분석하고, 스페인어 광고와 복싱 콘텐츠 협업 등 라틴계 소비자 친화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업계는 단기적 해결책이 마땅치 않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보스턴 비어’ 창립자 짐 코흐는 인터뷰에서 “좋은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소비자의 신뢰를 잃은 지금, 단순한 할인과 이벤트로는 효과가 미미하다는 분석이다.

코카콜라는 회복을 위해 스페인어와 영어를 병행한 ‘모두를 위한(Para Todos)’ 캠페인을 재시작했다. 이는 20년 전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한 광고를 미국식으로 재해석한 것이지만 기업의 진정성 전달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ICE 단속이 라틴계 소비자들의 행동을 바꿨고, 이는 곧바로 미국 소비 시장의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 단속이 더 강화될 경우 기업들은 더 큰 매출 손실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 경제에서 라틴계 소비자의 존재감은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깝지만 정치가 만든 불안은 시장의 기본 전제마저 뒤흔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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