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 부활…명목화폐 60년 실험 실패?
각국 중앙은행 ‘골드러시’ 지속 … FT “금, 불확실한 시대의 피난처”
1970년대 초 금본위 글로벌 통화체제가 막을 내리자 각국 중앙은행은 보유하던 금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수십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현재 금은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가장 보수적인 투자자들까지 금에 다시 주목하고 있다. 금은 지난해 유로화를 제치고 전세계 중앙은행들의 두번째 큰 준비자산이 됐다. 중앙은행들의 사상 최대 규모 순매수 덕분이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5일 “정치·경제적 전제가 흔들리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금은 다시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다”며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벌이는 무역전쟁, 전세계 곳곳에서 고조되는 지정학적 긴장, 달러의 장기적 위상에 대한 의구심 등이 모두 금 가격 급등을 자극하고 있다. 금값 랠리에 금 낙관론자들조차 놀라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올해 4월 금 가격은 1980년 기록을 넘어 사상최고치를 돌파했다. 올해 들어서만 약 30% 상승했다. 최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소식이 전해진 직후 금값은 다시 최고치에 근접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금은 주식·에너지·주요통화를 모두 앞지른 최고의 자산이 됐다.
올해 금값은 온스당 3000달러를 돌파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1000달러를, 코로나19 팬데믹 때 2000달러를 넘어선 바 있다. 스위스 픽테자산운용 최고전략가 루카 파올리니는 “금은 모든 것이 불안정해 보일 때 보유해야 할 자산”이라고 말했다. 세계금위원회(WGC) 최고시장전략가 존 리드는 “금값 급등의 핵심 이유는 한마디로 트럼프다. 미국정부로부터 불거지는 위험과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정부가 촉발한 골드러시
트럼프 2기정부가 들어서면서 금은 안전자산 위상을 되찾기 시작했다. 올해 4월 트럼프 대통령이 전격적인 ‘해방의 날’ 관세를 선포하자, 시장 충격을 견딜 피난처를 찾아나선 투자자들은 금과 같은 귀금속이나 독일국채 같은 안전자산에 자금을 몰아넣었다. 올해 1~5월 금을 기반으로 한 상장지수펀드(ETF)로의 순유입량은 322.4톤으로 팬데믹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FT는 “하지만 더 중요한 요인이 있다”며 “달러와 미국채는 일반적으로 글로벌 시장 충격이 발생할 때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양상”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무역·금융 시스템을 지탱하는 달러패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예의주시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정부는 달러패권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정책과 조치를 잇따라 꺼내들었다. 대표적으로 외국기업의 미국투자에 세금을 매긴다는 방안,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독립성 공격 등이다. 미국정부의 부채와 적자에 대한 우려가 이미 팽배한 상황과 맞물리면서 투자자들은 달러자산 매입을 주저하고 있다.
글로벌 싱크탱크 ‘공적통화금융기구포럼(OMFIF)’의 미국 의장인 마크 소벨은 “미국정부가 달러패권의 기반을 약화시키면서 금값이 상승하고 있다”며 “연준과 법원을 공격하고 대규모 감세안을 통해 부채와 적자를 대폭 늘리겠다는 한편, 동맹국들과 교역국들에게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행동하는 것 모두가 달러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은행들 금매입 열풍 당분간 이어질듯
전세계 각국 중앙은행들은 경제 혼란기를 견디기 위한 비상자금으로 준비자산을 보유한다. 기관이나 개인 투자자와 달리 중앙은행들은 높은 수익을 제공하는 자산이 아니라 위기 때 가치를 유지하고 쉽게 매각할 수 있는 자산을 선호한다.
지난 수십년 그같은 대상은 단연 달러자산이었다. 29조달러 규모의 미국채 시장은 세계 최대이자 가장 유동적인 채권시장이었다. 하지만 지난 수년간 각국 중앙은행은 달러자산 규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 제재에 따라 달러자산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침공 이후 달러 탈피 추세가 가속화됐다. 미국이 러시아의 금융시장 접근을 차단하자 많은 국가들이 자국의 달러자산도 취약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전세계 중앙은행들의 금 순구매량은 지난 3년 동안 매년 1000톤을 넘었다. 이는 기록적인 수준이다. 특히 중국과 인도 튀르키예 등 신흥시장 국가들이 금 매입 열풍을 주도했다. 당분간 그같은 열풍은 이어질 전망이다.
17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WGC와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가 72개국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43%가 향후 12개월 내 금 보유량을 늘릴 계획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29%보다 크게 증가한 것이자 지난 8년간 조사 중 가장 높은 수준이기도 하다. 블룸버그는 “금 보유량을 줄이겠다고 응답한 중앙은행은 한 곳도 없었다”고 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의 경제사학자 배리 아이켄그린은 “각국 중앙은행 입장에서 달러 대체재가 부족한 상황이다. 유로자산 등이 있지만 미국채와 비교하면 투자가능성이 낮다”며 “금의 내재적 가치보다는 대체재의 한계 때문에 금으로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각국 중앙은행들의 금 보유량은 톤수 기준으로 1965년 브레튼우즈 체제 시절의 최고치와 맞먹는다. 런던금시장협회 최고경영자 루스 크로웰은 “중앙은행 금 보유량이 역대 최고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중앙은행 준비자산에서 금이 유로를 넘어선 건 판도를 바꾸는 게임체인저”라며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 주류 투자자들 사이에서 불확실성 시기 금의 안전자산 역할에 대한 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달러대체 어렵지만 피난처 역할 강화
물론 대부분의 투자자와 경제학자들은 금이 달러를 대체할 주요 준비자산이 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글로벌 금융·무역 시스템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과 유동성 때문이다.
달러와 비교하면 금은 치명적인 물리적 단점을 갖고 있다. 올해 트럼프발 관세 우려에 트레이더들이 세계 2번째로 큰 금보관소인 영국중앙은행에서 뉴욕으로 실물금을 옮기려 했던 상황이 대표적이다. 실물금 인출에 수주간 대기줄이 생길 정도로 상황이 굼뜨게 돌아갔다. 영국중앙은행 직원들이 인출 요청을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HSBC 귀금속분석가 제임스 스틸은 “금값 반등은 포트폴리오 재편의 일환”이라며 “일부 중앙은행이 달러자산 보유량을 줄이려고 분주하지만 달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의 부채증가도 골드러시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트럼프 감세법안은 향후 10년 동안 미국 부채에 2조4000억달러를 추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투자자들은 전통적인 명목화폐가 가치하락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들은 정부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명목화폐는 재정방만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금광기업 ‘휘튼프레셔스메탈스’의 CEO 랜디 스몰우드는 “우리에겐 정치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중립적인 가치저장수단이 필요하다”며 “금의 부활은 과거로의 회귀다. 20년 뒤 경제학 강의에선 1970년부터 2030년까지 60년간의 명목화폐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내용이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은 1930년대 대공황 기간 경제적 고통을 악화시킨 금본위제에서 각국이 벗어나려 애썼던 이유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금에 가치를 고정한 금본위제는 정부가 경제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통화공급을 늘리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통화가치를 실물금에 연동시키는 것은 안정성보다는 변동성의 원인이 됐고 이는 중앙은행과 정부의 행동을 제약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투자자들은 금값의 기록적 상승세가 지속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금을 여전히 헤지수단으로 추천한다. 픽테자산운용 파올리니 전략가는 “향후 금은 최근 상승세를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글로벌 다중자산 포트폴리오에서는 가격대와 상관없이 보유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금의 핵심매력인 위기피난처 역할이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휘튼프레셔스메탈스 스몰우드 CEO는 “금은 ‘위안의 금속(comfort metal)’이다.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있을 때 위안을 찾는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많은 스트레스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