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해협 위기 이후 북극항로 관심 더 커졌다

2025-06-27 13:00:32 게재

중동석유·남방항로 의존 에너지 공급망 취약 … ‘플랜B’ 요구

정부, 북극항로개발·거점항구육성 가속 … 국회, 특별법 발의

이스라엘-이란 전쟁으로 중동 일대에 긴장이 고조된 열흘 동안 중동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 경제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났고, 생존을 위한 대안에 대한 관심도 고조됐다.

정영두 한국해양진흥공사(KOBC. 해진공) 해상공급망기획단장은 26일 “한국처럼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해상 항로의 다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정 단장은 이에 앞서 25일 서울 해운빌딩에서 열린 ‘중동사태 관련 수출입물류 비상점검회의’에서 ‘이란-이스라엘 군사 충돌에 따른 해상 공급망 영향분석 및 대응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정학적 변동이 해상공급망 불확실성 키워 = 26일(현지시간) 로이터는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휴전이 이뤄진 후 중동지역 해상 운송비가 하락했지만 긴장이 고조되면 운임이 다시 오를 수 있다고 해운 및 보험업계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로이터는 이번 전쟁으로 세계 석유·가스 수요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을 이란이 폐쇄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두려움도 확산됐다고 세계의 충격을 묘사했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한 12일(한국시간) 브렌트유 가격은 1배럴(158.9리터)당 69.49달러에서 이란의회가 호르므주해협 봉쇄 결의안을 의결한 22일 79.49달러까지 올랐다. 같은 기간 중동에서 아시아로 오는 유조선 운임지수는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기준 43.60에서 91.35(23일)로 109.6% 급등했다.

특히 이란 의회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은 세계에 충격을 줬다.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에도 호르무즈해협은 봉쇄되지 않았고, 이번에도 의회는 이란 최고 안보 기관인 국가안보위원회(SNC)가 최종 결정한다고 밝혔지만 우리나라를 포함 세계 각국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한 대안 ‘플랜B’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더하게 됐다.

해진공 등에 따르면 호르무즈해협은 세계 해상 무역량의 11%, 해상 원유 수출의 34%가 통과한다. 하루 평균 144척(탱커선 37%, 컨테이너선 17%, 벌크선 13%)이 통항하는 이 해협이 봉쇄될 경우 하루 1800만 ~ 2000만배럴의 원유 운송이 중단될 수 있다.

한국은 원유 수입의 63%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이라크 등에 의존하고 있어 충격을 피할 수 없다. 액화천연가스(LNG)도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등 중동 의존도가 30% 이상이다.

이란에 초대형 벙커버스터를 폭격하며 이스라엔-이란 전쟁을 강제 휴전시킨 미국은 해상 공급망에서 미국의 역할을 다시 확인시켰지만 미국이 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때 벌어질 불확실성도 보여줬다.

김성범(오른쪽 둘째)) 해양수산부 차관은 25일 서울 해운빌딩에서 열린 ‘중동사태 관련 수출입물류 비상점검회의’에서 한국해양진흥공사 한국무역협회 한국해운협회 등 유관기관과 HMM 팬오션 SK해운 등 국적선사 임원진들이 참여한 가운데 ‘이란-이스라엘 군사 충돌에 따른 해상 공급망 영향분석 및 대응방안’ 등을 논의했다. 이번 위기 이후 남방항로를 보완할 북극항로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사진 해양수산부 제공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수출입 물동량과 에너지 수입량의 상당 부분이 남중국해, 말라카해협, 수에즈운하 또는 호르무즈해협, 말라카해협, 남중국해를 직렬로 연결하는 항로를 경유하고 있어 구조적 취약성이 심각하다고 지적(출처. 대한민국 마지막 기회가 온다)했다.

세계적 지정학자 피터 자이한도 페르시아만에서 전쟁이 발발해 세계 에너지공급망에 충격이 발생하면 공급망의 끝 부분에 있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겪을 위기를 분석했다. 이들은 모두 생존을 위한 대안을 촉구했다.

석유나 가스 뿐 아니다. 해진공이 분석한 ‘벌크화물 항만물류 공급망 진단’에 따르면 원유 뿐 아니라 주요 원자재 전반에 걸쳐 특정 국가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게 나타난다.

철광석은 호주와 브라질 두 국가에 87%를 의존하고 있어 이들 국가에서 발생하는 정치적·경제적 변화에 한국 산업이 직접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북극을 둘러싼 국제경쟁 = 정부는 남방항로에 의존하고 있는 에너지 원자재 수입과 전략물자 수출입 물류를 보완할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주목하고 있다. 러시아는 중동 등에 의존하고 있는 에너지자원 공급원으로서 기능도 할 수 있다. 북극해를 덮고 있는 얼음이 녹으면서 인류는 기후변화에 따른 각종 재해에 대응하는 것과 함께 자원을 개발하고 항로를 이용할 기회도 엿보고 있다.

25일(현지시간) 미국 해운조선 전문미디어 지캡틴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헤이그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에서 현재 사용 가능한 중고 선박을 구입하는 것을 포함해 핀란드로부터 최대 15척의 쇄빙선을 구매하기 위해 협상 중이라고 확인했다.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이 북극항로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에 대응해 지난해 캐나다 핀란드와 함께 ‘쇄빙선 협력 협정’을 맺고 △각국의 조선산업과 산업 역량 강화 △극지 쇄빙선 건조 및 기타 북극 역량 등에 초점을 맞춘 정보 교환과 인력 개발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핀란드의 주요 쇄빙선 엔지니어링 기업 ‘아케르 아틱’은 최근 선박 설계업체 ‘블루테크’와 합병해 쇄빙선 공급 능력을 확대했고, 캐나다 조선소 ‘다비’는 헬싱키 조선소를 인수하며 쇄빙선 역량을 강화했다.

북극해에서 떨어져 있는 한국과 중국 일본은 8개 북극연안국으로 구성된 북극이사회에 옵서버 국가로 가입해 있지만 북극에 대한 집중도는 차이가 있다.

중국은 2018년 ‘빙상실크로드’ 구상을 발표하며 북극항로를 일대일로에 포함시켰다. 국영선사 코스코는 2013년 이후 매년 북극항로 운항을 확대했고, 중국 국영기업들은 러시아 야말 LNG 프로젝트에 90억달러를 투자해 ‘북극 LNG3’ 사업 지분도 확보했다. 현재 북극항로를 운항하는 쇄빙 LNG선 15척 중 9척을 중국이 운영한다.

중국의 북극 전략은 단순한 항로개척을 넘어 자원 확보와 지정학적 영향력 확대를 동시에 추구한다. 중국은 ‘북극 인접 국가’(near arctic state)라는 개념을 만들어 스스로 북극에 대한 이해관계자로 행동하며 극지 거버넌스에서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일본은 2015년 북극정책을 수립하고 ‘법의 지배에 기반한 자유롭고 개방된 북극’을 추구했다. 일본 선사 MOL은 야말 LNG 프로젝트에 쇄빙 LNG선 3척을 투입했고, 미쓰이 등은 ‘북극 LNG2’ 지분 10%를 확보했다.

일본은 또 북극 관측을 위한 쇄빙연구선 ‘미라이2’를 건조 중이다.

미라이2는 2027년 첫 운항에서 북극점을 목표로 항해하는 등 국제적인 연구협력을 선도하겠다는 계획이다.

한국은 중국 일본과 함께 2013년 북극이사회 옵서버 국가에 가입하고 현대글로비스가 첫 북극항로 운항에 성공했지만 중국 일본에 비해 북극 진출에 뒤쳐지고 있다.

그동안 한화오션(옛 대우우조선해양)이 쇄빙 LNG선 15척을 건조하는 성과를 거뒀지만 해외 에너지 등 인프라 투자는 미흡하다. 원유 터미널 5개, 곡물 터미널 2개 보유로 중국·일본에 비해 크게 뒤쳐진다.

◆북극항로 사업 재정비·실행할 골든타임 = 정부는 북극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북극항로 거점항구 육성과 항로 개발에 속도를 높이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문대림(더불어민주당. 제주시갑) 의원도 ‘북극항로 구축 지원 특별법’을 대표 발의하며 북극항로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특별법에는 해수부 장관이 5년마다 ‘북극항로 개척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설치해 범부처 간 협력체계를 구축하도록 했다.

북극항로 시대가 본격화하면 부산과 울산 경남 등 동남권이 전략적 거점항구로 성장할 가능성도 주목받고 있다. 해진공이 북극항로에서 경제성이 높은 화물군을 분석한 결과, 에너지와 원자재가 가장 유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LNG는 이미 러시아 야말반도에서 생산된 물량이 북극항로를 통해 아시아로 수출되고 있다. 원유와 석탄 등 벌크화물도 운송거리 단축으로 큰 비용절감이 가능하다. 반면 컨테이너선은 정시성과 대량 수송 요구에 현재 여건이 미흡하다.

해진공은 국적선사들과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북극항로 개척을 적극 뒷받침할 계획이다.

해진공은 극지용 선박 건조에 필요한 금융지원 체계를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운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항로 개척에 필요한 종합 지원을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안병길 해진공 사장은 “이스라엘-이란 충돌은 우리 해상 공급망의 취약성을 드러냈지만, 동시에 패러다임 전환의 계기가 되고 있다”며 “특별법이 발의돼 제정을 앞두고 있는 지금이 북극항로 관련 사업들을 재정비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강조했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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