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외면 장기국채 시장 ‘불안'
미국·일본·영국 등 장기물 발행 축소 움직임 … SLR 규제완화로 수요 회복 기대
파이낸셜타임스(FT)는 2분기 들어 미국 장기채권 펀드에서 110억달러 가까운 자금이 빠져나갔다고 보도했다. 이는 2020년 초 코로나19로 시장이 요동치던 시기 이후 최대 유출 규모다. PGIM의 글로벌채권 책임자 로버트 팁은 “인플레이션이 목표치를 웃돌고 정부의 발행 물량이 많다는 점이 장기채권 시장 전반에 불안감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 중인 대규모 감세 법안이 향후 10년간 2조4000억달러의 적자를 추가로 유발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장기물 수요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고정금리를 지급하는 장기채권은 인플레이션에 취약한 구조인 만큼, 정부 지출 확대와 물가 상승 가능성이 맞물릴 경우 채권 가격은 더욱 압박받게 된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같은 비관론 속에서도 일부 투자자들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근 발표된 낮은 인플레이션 수치와 미국 정부의 장기물 발행 축소 기조가 장기채권 시장에 대한 낙관론을 일부 되살렸다는 것이다. WSJ는 “정부는 앞으로도 단기물 발행 비중을 늘리고 장기물 발행은 억제할 것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장기 금리 상승 압력은 제한적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미 재무부는 단기 국채(만기 1년 이하) 발행 비중을 현재보다 높여 전체 발행의 25% 수준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며, 2년~7년물 중기채 중심으로 차입 구조를 재조정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일본 정부 또한 지난 5월 20일 20년물 국채 입찰에서 부진한 수요를 확인한 후 19일 장기물 발행 규모 축소를 공식화했다.
이처럼 주요국이 장기물에서 단기물로 발행 전략을 전환하는 것은 시장의 수요 흐름에 대응하는 조치이지만, 일각에서는 단기 차입 의존도가 높아질 경우 향후 재차 금리가 급등할 때 재정 부담이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한편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최근 대형 은행의 자본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하며, 국채 수요 회복을 도모하고 있다. 연준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보완적 레버리지 비율(SLR)’을 낮추는 규정을 제안했다. 이는 대형 은행들이 보유해야 할 핵심 자기자본 비율을 낮춰 국채 등 저위험 자산에 대한 보유 여력을 확대하는 조치로, 미셸 보우먼 연준 금융감독 담당 부의장은 “이번 조치는 금융시장 스트레스 상황에서 국채시장 기능을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준에 의하면 이번 규제 완화안이 시행되면 미국 대형은행 자회사들의 자본요건이 약 2100억달러 감소할 전망이다.
이에 대해 일부 연준 위원들은 은행 건전성 저하와 금융 불안정성 확대를 우려하며 반대 입장을 보였다. 마이클 바 전 연준 금융감독 담당 이사는 “이번 조치는 대형 은행의 실패 가능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현재와 같은 공급 증가와 수요 위축이 동시에 나타나는 국채 시장 환경은 단기적으로 장기물 수익률에 변동성을 키울 수밖에 없지만, 규제 완화와 중앙은행의 유연한 대응이 일정 부분 수요 회복을 도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블루베이의 안드레이 스키바는 “미국 국채의 글로벌 핵심 자산으로서의 역할은 여전히 견고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장은 장기물에 대해서 더 높은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며 “지진은 없겠지만, 진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현승 기자 hsy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