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협치 복원에는 왕도가 없다
지난달 26일 이재명 대통령의 첫 국회 시정연설. 이날 야당 의원들은 피켓을 들거나 야유는 하지 않았지만 박수도 치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했다. 이에 이 대통령은 “국민의힘 의원들은 반응이 없는데 좀 쑥스럽다”며 에둘러 호응을 호소했다. 퇴정 때에는 국민의힘 의석쪽으로 가서 악수를 나눴다.
앞서 22일 관저에서 진행된 이 대통령과 여야 대표의 첫 회동. 이 자리에서 김용태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A4용지 3장 분량의 요구사항을 약 8분 간 읽어 내려갔다. 이 중에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재판을 받겠다고 약속하라’는 것도 있었다. 잠깐 긴장된 순간이 이어졌지만 이 대통령은 “내가 윤 전 대통령 앞에서 발언했을 때보다 짧은 것 같다”고 농담으로 풀어냈다. 이 모두가 새 정부 들어 바뀐 대통령 주변 풍경들이다.
죽여야 할 ‘적’을 이겨야 할 ‘경쟁자’로 바꾸려면
지금까지 이재명표 협치 노력은 합격점이다. 전 정부가 임명한 각료들과의 ‘불편한 동거’도 별 잡음없이 이끌고 있다. 반대 목소리도 일단 듣는다. 야당의원 등 생각이 다른 이와의 만남도 스스럼이 없다. 야당과의 만남 자체를 꺼려했던 윤석열 전 대통령과는 천양지차다.
이 대통령의 이런 모습들은 국민으로부터도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4~26일 실시한 이 대통령의 첫 직무수행 조사 긍정평가는 64%로 나왔다. 윤 전 대통령 첫 직무수행 평가보다 12%p 높다. 시장의 기대감이 반영된 듯 코스피도 ‘3000의 벽’을 뚫고 순항중이다.
하지만 대통령에게서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협치는 아직 까마득하다. 민주당은 이번 주 안에 단독으로 국무총리 인준안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것마저도 지난달 30일 본회의를 열어 강행하겠다는 걸 우원식 국회의장이 여야가 합의하라며 미룬 것이다. 법사위원장 예결위원장 등은 이미 민주당 뜻대로 뽑았다. 국민의힘은 ‘김민석 국무총리는 안된다’며 배추를 쌓아놓고 국민청문회라는 걸 열며 어깃장을 놓았다.
앞서 이재명정부 인수위원회 격인 대통령 직속 국정기획위원회에서도 눈살 찌푸리게 하는 장면들이 연출됐다. 검찰과 방통위 등 미운털 박힌 부처 업무보고에서 윽박을 지르며 점령군같은 모습을 보인 것이다. 오죽하면 대선 때 이 대통령을 지지한 인사에게서도 “윤석열이 임명한 장관들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은 어색하다. 논리적이지도 않다”라는 비판이 나왔을까. 점령군과 협치는 애초 함께 할 수 없는 그림이다.
사실 우리 정치현실에서 협치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만 같아도 같이 할 수 있는 게 정치라는데 우리 정치판에서는 하나만 달라도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다. 정치가 스포츠와 전쟁 중간 어디쯤이라고 한다면 한국정치는 거의 전쟁 수준이다. 스포츠에서 상대는 ‘이겨야 할 경쟁대상’이지만 전쟁에서 상대는 ‘죽이지 않으면 안되는 적’일 뿐이다.
더구나 이 대통령에 대해 ‘묻지마 적개심’까지 내비치는 강경보수의 존재는 협치를 더 어렵게 만든다. 보수 인사들 중에는 공공연하게 “윤석열의 가장 큰 문제는 이재명을 제거하지 않고 일을 저지른 것”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위헌불법 내란사태는 용납할 수 있어도 이재명에게 기회를 준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이다.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할 야당이 대통령이 내민 손을 선뜻 잡아줄리 만무다.
레이건 대통령 사례에서 배우는 설득의 정치
미국의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지만 그가 ‘위대한 소통자(The Great Communicator)’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는 간결한 언어구사 능력과 배우 시절 체득한 표현력, 유머감각으로도 유명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 반대편마저도 대화와 협상으로 설득한 것으로 더 유명했다.
공화당 출신인 레이건은 여소야대 하원의 벽을 넘기 위해 틈만 나면 민주당 의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가 취임 후 첫 100일 동안 만난 의원은 총 49회, 467명이라고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중간선거 패배 후 크리스마스 휴가까지 반납하고 레이건 전기를 읽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
물론 이 대통령의 처지는 레이건과 다르다. 여소야대도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절대의석의 여당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에게 지금 요구되는 것은 레이건 사례인 것 같다. 야당이 날을 세우고 얼굴을 돌려도 만나고 설득하고 협상해야 한다. 국민이 ‘그만하면 됐다’고 할 때까지. 무너진 협치를 복원하는 데는 왕도가 없다.
남봉우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