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글로벌 표준’을 노리는 차이나 테크
한때 ‘모방’과 ‘저가 생산’의 대명사로 통하던 중국 기술력이 이제 세계 산업 질서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 2025년 중국의 기술 혁신은 단순한 추격 단계를 넘어 기존 규칙 자체를 재정의하는 수준이다.
전기차 태양광 인공지능(AI) 반도체 로봇 등 첨단 산업에서 중국은 더 이상 후발주자가 아니라 주도권 경쟁의 중심에 있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 이면에는 구조적 변화와 치밀한 전략이 작동하고 있다.
중국 산업정책의 실체는 중앙정부의 지휘와 지방정부, 민간기업의 실험적 시도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결과다. 미국 스탠퍼드중국경제제도센터(SCCEI)가 지난 20년간의 정책 문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산업 정책의 80%가 지방정부 주도로 이루어진다.
각 지방 정부는 보조금, 세제 혜택, 인프라 지원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동원해 지역의 강점을 살린 산업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과잉투자와 중복경쟁 같은 부작용도 나타나지만 치열한 경쟁과 실험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산업 전략의 진화와 중국식 혁신 생태계
중국 제조업의 혁신 동력은 현장 중심의 경험적 지식과 빠른 실행력, 산업 간 긴밀한 연계에서 비롯된다. 전기차 배터리 스마트폰 로봇 등 여러 산업이 서로의 혁신을 촉진하며 설계와 제조, 공급망 관리가 실시간으로 맞물린다.
프린스턴대 카일 찬 박사는 “중국의 혁신 시스템은 독립된 수직 구조가 아니라 상호 교차하고 시너지를 내는 생태계”라고 분석한다. 이처럼 산업 현장과 연구개발(R&D), 공급망이 긴밀하게 연결된 구조로 인해 신제품 개발과 대량 생산의 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진다.
올해 초 세계를 놀라게 한 딥시크는 챗GPT-4 개발비의 1/10도 되지 않는 비용으로 서구 대형 모델에 맞먹는 성능을 구현했다. 딥시크 이후 중국의 AI 생태계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지난 4월 기준 중국 정부가 관리하는 알고리즘 등록 데이터베이스에는 3700개가 넘는 생성형 AI 알고리즘이 등재되어 있다.
대형 IT 기업뿐 아니라 수백 개의 스타트업 국가 연구소 지방정부까지 폭넓게 참여하는 역동적 생태계다. 대표 인터넷 기업들은 AI 연구개발 인력을 대규모로 확충하고 로봇 클라우드 산업용 AI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제품과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중국은 미국과 유럽의 견제 속에서 자체 칩 개발과 생산능력 강화, AI+제조업 융합 전략으로 맞서고 있다. 화웨이 SMIC 등 주요 기업들은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국산화율을 높이고 AI 칩 대규모 모델 응용서비스까지 수직계열화를 추진한다.
미국과 유럽은 반도체 장비·AI 칩 수출통제, 공급망 재편으로 맞서고 있으나 중국은 자체 생태계의 확장과 기술 내재화로 대응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기술 표준, 데이터 거버넌스, 플랫폼 경쟁 등 새로운 갈등 양상이 나타난다.
중국은 AI, 반도체, 그린에너지 등에서 글로벌 표준을 선점하기 위해 일대일로 디지털 실크로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는 단순한 수출 경쟁을 넘어 기술 규격·플랫폼·데이터 거버넌스까지 중국식으로 확산하는 전략이다. 표준 선점 전략은 외국 기업과의 상호작용에서 더욱 복합적으로 작동한다.
유럽과 미국 기업들은 중국의 거대한 시장과 혁신 역량을 활용해 중국 내수시장에 진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방 기업들은 첨단 기술의 이전이나 노하우 유출, 그리고 중국 기업의 빠른 성장에 따른 현지 시장 점유율 감소 등 새로운 리스크에도 직면하고 있다.
독일 싱크탱크 메르카토르중국연구소(MERICS)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은 첨단 기술 유치를 위해 외국 기업에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지만 자국 기업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외국 기업은 곧장 밀려나는 위험에 직면한다.
중국의 산업 정책은 자국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나 외국 기업에 대한 규제에 그치지 않는다. 중앙정부는 전략적 우선순위 설정과 규제 도구 활용에 집중하고 지방정부는 보조금, 인프라, 노동 지원 등 직접적 기업 지원에 치중한다.
산업의 성장 단계에 따라 정책 수단을 달리한다. 초기에는 진입장벽 완화에 집중하고 성숙 단계로 가면서 R&D, 인력 양성, 글로벌 차원의 공급망 조정 등으로 전환한다.
주도권 경쟁과 세계 질서의 재편
우리 기업과 정책 당국은 방어 차원의 조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중국의 혁신 생태계와 표준 선점 전략에 대응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개방적 혁신, 민관협력, 표준화 경쟁력 강화 등 입체적 대응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