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아세안과 진정한 연결 실현할 때

2025-07-11 13:00:01 게재

디지털 무역·생산거점·제도적 신뢰 구축해 공급망 연결 필요 … 한국, 협력촉진자 역할해야

9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58차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외교장관회의 및 관련 회의 개막식에서 회원국 장관 등 참석자들이 단체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일관되지 못한 대외정책을 추진하며 세계 통상질서를 불확실성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미·중 간 전략경쟁은 잠정적 합의에도 아직도 명확하게 내용이 알려지고 있지 않으며, 이란-이스라엘,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지속된 분쟁은 세계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기후, 인구, 식량 등 구조적 위기가 서로 실타래처럼 엉키며 세계경제는 항구적 위기 상태로 전환되었고, 전통적 의미의 안보보다는 경제안보, 특히 공급망의 안정성이 중요해졌다.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지역화(regionalization)’를 촉진하고 있다. 미국, 중국,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한 지역 무역블록이 부상하고 있고, 이들 블록을 중심으로 한 역내 무역은 역외 무역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지역화의 진전은 공급망을 단축시키고 지리적 분절화를 증가시킨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과 아세안 각국은 주요 무역권과 활발한 교역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통상협상을 진행해야 하는 한국, 일본 및 아세안의 신흥 제조국은 각국 간의 공급망 연결 정도와 미, 중, EU 등 주요 무역 허브 사이의 위치 설정에 따라 각기 다른 협상력을 갖게 될 전망이다.

한-아세안 공급망 연결, 전략적 협상력 열쇠

한-아세안(ASEAN) 간 공급망 연결 강화를 통한 안정적 공급망 구축은 강대국에 대한 협상력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다.

2030년까지 아세안 지역은 세계 4위의 경제권으로 도약할 전망이다. 중산층 인구도 빠르게 증가해 소비시장으로서의 잠재력도 크다. 한국과 아세안 지역은 모두 중국과의 교역 비중이 높아 교역 및 공급망의 다변화가 절실하다. 수입다변화를 통한 공급망 안정성 강화라는 과제를 양 지역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산 제품의 우회 수출 기지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서도, 높은 대미 수출 비중을 지닌 아세안 회원국들은 한국과의 공급망 연결에 관심이 크다. 또한 베트남을 위시한 아세안 회원국의 원산지 관리 강화가 최근 본격화되면서, 한국도 아세안과 공급망 연결을 강화할 필요성이 더욱 증가하고 있다.

한편 2025년 5월 발표된 ‘아세안 연결성 전략계획(ACSP)’은 지속 가능한 인프라, 디지털 혁신, 공급망 회복력, 제도적 협력, 사람 간 연결 등을 6대 전략 분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ASEAN 공동체 비전 2045’를 실현하고자 한다.

회원국 간 이질성, 제도·역량·인식의 불균형, 내부 경쟁과 외부 의존구조 때문에 기존 ‘아세안연결성마스터플랜(MPAC) 2025’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ACSP는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여 실질적 실행력을 제고하고, 모니터링 체계 강화 및 민관 협력 확대, 디지털 및 하위 지역(sub-regional) 협력 강화 등을 통해 실질적 연결성과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한다.

한-아세안 공급망 연결 고도화의 세 방향

한-아세안 무역은 중간재 중심의 구조로, 한쪽의 수출 감소가 타국의 수출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상호의존성을 지니며, 이는 공급망 연결을 의미한다. 양 지역 간 무역은 2022년 정점을 찍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다시 확대하기 위한 공급망 연결의 고도화가 필요하다.

양 지역 간 공급망 연결의 고도화는 다음 세 방향으로 추진할 수 있다. 첫째, 공급망 회복력 강화를 위한 규범 및 제도 협력이다.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기반의 물류 최적화와 디지털 무역이 공급망 운영의 핵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제 디지털 통상규범은 미비한 상황이며, 각국의 데이터 주권·사이버보안·조세 기준은 상이하다. 한국은 아세안과 함께 디지털 무역 규범 수립과 관련 인프라 공유에 협력함으로써, 공동의 규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둘째, 생산 거점의 다변화와 녹색 공급망 구축이다. 한국의 대중국 수입 의존도는 여전히 높다. 아세안 역시 아세안-중국 자유무역협정(ACFTA) 3.0 타결 이후 중국 중심의 공급망에 더 깊이 편입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동시에 아세안 산업의 자율성과 기술 독립성에 위협이 될 수 있다. 한국이 아세안 전역을 투자 대상지로 삼고, 첨단기술을 기반으로 한 공동 생산, 부품 현지 조달, 녹색 기술 협력 등을 통해 아세안과 함께 공급망을 구축한다면 양 지역 모두에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제도적 신뢰 구축과 다자 거버넌스 연계다. 아세안은 단일 시장이 아니며, 국가 간 규제·제도·인프라 격차가 크다. 이에 한국은 아세안연계성전략(ACSP)의 세 가지 축(물리적, 제도적, 사람 간 연계)을 기준으로 협력모델을 설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세안단일창구(ASEAN Single Window)와 한국의 전자통관 시스템을 연계하거나, 민관협력(PPP) 기반으로 공동 물류허브의 설립을 고려할 수 있다.

상호 신뢰는 공급망 연결의 기반

한국은 아세안과 함께 기존의 ‘패권질서’가 아니라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공급망 질서의 설계자(designer)가 될 수 있다. 한국은 위기를 낡은 틀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새로운 질서 창조의 기회로 삼을 충분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이제 ‘연결(Connectivity)’을 새로운 전략자산으로 재정의할 때다.

한국과 아세안이 공급망으로 더욱 강하게 연결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호 신뢰의 구축이다. 아세안은 특정 국가에 의존하지 않는 ‘비동맹 중견국 연대’를 지향하며, 한국 역시 자율적이고 책임 있는 국가로서 동반자적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 아세안 회원국과의 공통 규범 개발, 산업별 시범사업 확대, 시민사회 및 청년세대의 참여 보장 등은 모두 ‘신뢰’를 기반으로 가능하다. 현재 진행 중인 한-아세안 FTA 개정 협상, 공급망 통합 플랫폼 구상, ‘ACSP’와의 연계는 이러한 신뢰 기반 전략의 실천 사례가 될 수 있다.

인재 양성과 기술이전 또한 신뢰 형성의 핵심이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축구의 르네상스를 이끈 박항서 감독과 신태용 감독의 사례는, 한국이 가진 전문성과 시스템이 아세안 청년들의 잠재력을 어떻게 현실화하는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직업훈련 프로그램, 공동 R&D 센터, 청년 스타트업 교류 등은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아세안 현지의 자생적 산업역량을 키우는 기반이 되면, 양 지역 간 신뢰 강화에 도움이 된다.

역내 ‘협력 촉진자’로서 한국의 역할

아세안과의 공급망 재편 논의에서 우리는 아세안 역내에 ‘경쟁과 협력이 공존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아세안 각국은 자국을 공급망의 핵심 허브로 만들기 위해 법·제도 개선, 인프라 확충, 투자 인센티브 제공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는 ‘옴니버스법(Omnibus Law)’을 통해 외국인 투자 장벽을 낮췄고, 필리핀은 공공서비스법 개정과 외국인직접투자법 완화를 단행했다. 베트남은 이미 한국 기업의 주력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고, 싱가포르는 디지털 통상과 지식재산권 제도에서 선도적 입지를 구축했다.

경쟁은 효율을 극대화하기도 하지만, 아세안 역내 회원국 간 경쟁은 역내 통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각국이 중복적으로 인프라를 건설하거나 서로 다른 규제 기준을 적용하면서, 아세안 역내 무역은 정체되고 있다.

한국은 단기적 사업성과에 연연하기 보다는 아세안 역내 ‘협력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아세안이 제시한 ACSP의 물리적 연계성, 제도적 조화, 사람 간 연계를 아우르는 통합 플랫폼 구축에 한국의 정책 경험과 기술력을 접목할 수 있다. 특히 공급망 위기 대응을 위한 ‘모니터링 및 경보 체계’ 구축, ‘공급망 리스크 공동 대응 기금’ 조성, ‘민관 공동위기 대응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운영 등을 통해 협력을 제도화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블록체인 기반 무역정보 공유 시스템, AI 기반 물류예측 모델, 스마트 항만 운영 기술 등을 아세안과 공동 시범사업(Pilot Project)으로 추진한다면 역내 디지털 전환을 촉진하는 동시에 우리기업 진출에 용이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

한-아세안 협력을 호주나 일본과 함께하는 삼각 협력으로의 확대도 고려할 수 있다. 한국-아세안-호주 또는 한국-아세안-일본 협력을 통해 인프라 공동개발, 기술표준 적합성 확보, 탄소중립형 생산 체계 구축 등 다양한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다.

특히 ‘녹색 공급망’ 구축을 위한 삼각 협력은 ESG 대응 역량을 높이고, 국제사회의 지속가능발전 목표(SDGs)와도 부합한다. 마지막으로, 한-아세안 협력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제도화된 상시 협의체계’ 수립이 필요하다. 예컨대, 공급망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정례 협의 플랫폼으로서 ‘한-아세안 공급망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기술표준, 통관절차, 원산지 검증, 노동 기준 등에 대한 지속적인 정책 대화를 이어가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연결’은 전략자산이자 상호신뢰 초석

아세안은 한국에 단순한 수출 시장이 아니라, 공급망 재편과 디지털 전환, 녹색 전환을 함께 구상할 수 있는 핵심 동반자이다. 그리고 한국은 아세안에 지정학적으로 중립적일 뿐만 아니라 고부가가치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파트너이다.

지금이야말로 한국과 아세안이 ‘지속가능하고 포용적인 공급망 질서’를 설계할 때다. 이 과정에서 ‘연결(Connectivity)’은 단순한 물리적 개념이 아닌, 전략자산이자 상호 신뢰의 초석이 될 것이다. 아세안과의 진정한 ‘연결’을 실현할 때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세계지역연구2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