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극우가 위험한 진짜 이유
계엄정국을 거쳐 새 정권이 출범한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떠오른 정치·사회적 논의가 있다. 바로 ‘극우’다.
극우에 관한 논의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을 띤다. ‘우려’ ‘분석’ ‘신중’이 그것이다. 우려형은 계엄정국이 종료되고 민주정 체제의 절차성이 복원되어 정상화되었다해도, 혹은 그렇게 보인다해도 극우의 등장과 영향력의 증대로 인해 민주정이 지속적으로 위협받을 것이라는 직관적 가정에 기초한다.
직관적 가정이라고 한 것은 극우를 개념적 측면에서 따지기보다 현상과 경험의 특이성에 대한 감각적 포착 속에 위험의 징후를 알리는 데 치중하기 때문이다. 극우는 주로 학술적 차원에서 나름 복잡하고 논쟁적인 개념인데, 이걸 일일이 따져 물을 여유조차 없다는 식이다.
분석형은 주로 극우가 무엇인지, 누가 극우인지, 그들을 왜 극우라고 할 수 있는지, 극우의 등장에 영향을 끼친 요인들은 무엇인지를 규명하는데 몰두한다.
이는 주로 제도권 학계를 중심으로 개념과 이론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유형이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해외 국가들의 경험과 이론적 고찰에 기초해 비교적 관점에서 한국의 특성을 추려내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직관적 가정에 바탕한 우려론을 보완하거나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논의 유형이기도 하다.
정치·사회적 논의로 떠오른 ‘극우’의 정체성
우려형과 분석형이 대체로 극우의 존재성을 인정(가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와 달리 신중형은 그와 같은 우려형과 분석형 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누군가를 섣불리 극우라고 낙인찍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해외 국가와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딱히 극우라고 부를 증거가 분명치 않다고 보기도 한다. 설사 증거가 있다해도 그것은 미미한 수준이며 과도하게 우려할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우려형의 정치성(정파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현 시기 극우 논의를 세 가지로 유형화해 분류했지만 우리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현실과 논의의 현장에서 그들 논의는 겹쳐있고 섞여있다. 필자의 주관적 독해를 통해 각각의 논자들이 강조하는 바라고 여겨지는 것을 추출해 떼어내고 나누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작업은 필수적이다.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논의에 꼭 필요한 게 바로 ‘종합’이다. 현실과 이론의 균형점을 찾아 논의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합적 관점에서 보자면 우려 분석 신중 모두 극우를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로서는 민주정의 정상적 운영과 작동의 교란 및 파괴 가능성이 주된 이유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야 한다. 그런 ‘위험 인지’에만 머무는 시각은 현상추종적이다.
극우현상은 민주정을 위협하는 게 분명하지만 현재의 극우는 우리가 민주정이라고 부르는 질서로서 민주정이 이미 붕괴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일 수 있다. 혹은 우리가 아직 민주정이라고 부를만한 질서를 세우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극우는 기성의 질서가 아닌, 미래의 질서를 위협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극우는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쟁투의 과정이기도 하다.
극우에 관한 세 가지 논의 유형 모두에 공통된 것이 또 하나 있다. 극우 논의를 미래의 관점에서 조망하고 그것으로 끌어가는데 무척 중요한 사항이다. 바로 반(反)민주정의 핵심 중 핵심인 ‘불평등과 차별 심화’ 같은 요인의 영향 여부다.
극우의 지향성이 끼칠 미래의 영향 짚을 때
몇몇 조사를 보면 그 요인의 영향은 크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즉, 현재까지 한국의 극우 현상은 불평등과 차별의 심화에 대한 반감과 불만에 따른 게 아니다. 하지만 극우로 분류되는 이들의 특성을 보면 그들은 불평등과 차별의 심화를 용인하는 것으로 나온다.(‘서울 거주 경제적 상층일수록 극우청년일 확률 높다.’ 시사IN 2025년 7월 2일자 기사 참조)
이는 극우가 진짜 위험한 이유를 불평등과 차별을 용인하는 체제의 수호 혹은 건설이라는 점에서 찾아야 함을 알려준다. 단지 극우현상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 요인의 영향 여부를 따져물을 게 아니라, 극우가 불평등과 차별심화에 끼칠 영향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극우의 지향성이 끼칠 미래의 영향을 짚어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