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80살 유엔’ 인류의 희망인가, 용도폐기 될 유물인가

2025-07-18 13:00:49 게재

올해는 2차대전의 참화를 겪고 유엔이 창립된 지 80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그 축하의 속내는 명암이 교차해 복잡하다. 지난 80년간 3차대전의 발발을 막고 평화유지 개발지원 인권증진 등의 국제 공공재를 제공해온 긍정적인 기여는 평가받아야 한다.

반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스라엘의 하마스 헤즈볼라 이란과의 전쟁 앞에서 안전보장이사회가 마비되고 날로 악화하는 기후생태계 위기 등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국제사회의 실망과 비판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의 귀환 이후 가속화하는 일방주의 경향으로 유엔이 상징하는 다자주의와 글로벌 거버넌스 전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실존적 위협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데 반해 이에 대응해야 하는 다자주의의 약화가 겹치면서 글로벌 거버넌스의 위기상황이 야기되고 있다. 인류에 대한 실존적 위협의 퍼펙트스톰이 핵 겨울의 망령, 기후·생태위기, 통제되지 않는 신기술 등 세 개의 다른 방향에서 불어오면서 위기의 상승작용도 일으키고 있다.

2차대전 후 글로벌 거버넌스의 중심에 있었던 유엔에 대한 국제사회의 실망과 좌절은 유엔 사무국의 재정위기로까지 이어지는 부작용도 낳고 있다. 유엔 회원국들, 특히 미국 중국 등 주요 재정 기여국들의 정규 분담금 지연 납부로 인해 유엔 사무국은 유례없는 부도 직전 상황에까지 몰렸다. 이로 인해 유엔이 올해 내걸고 있는 ‘유엔 80 이니셔티브’는 유엔 80주년 축하의 긍정적 의미가 아닌 재정위기에 따른 예산·인원 감축, 효율성 제고 등 자구책 강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무용론보다 더 나은 유엔 만들기가 현실적

유엔에 대한 좌절과 실망이 커질수록 유엔 무용론도 커지고 더 나은 대안은 없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유엔을 없애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 공공재 제공자가 된 유엔을 대체할 수 있는 국가나 다른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매일 1억2000만명의 난민을 보호하고 1억5000만명을 먹일 수 있는 서비스 제공은 유엔만이 가능하다. 더 나은 다자주의의 제도적 대안이 마련될 때까지 이러한 기능이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현재로서는 유엔을 지속시키되 구조적 결함을 보완해서 보다 나은 유엔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 방안일 것이다. 유엔, 특히 안보리로 대표되는 정부 간 기관의 개혁이 시급하지만 약화하는 글로벌 컨센서스 하에서 단기간에 이뤄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과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첫째, 정부 간 차원의 과제다. 국제사회에 존재하는 이중 균열, 즉 글로벌 동·서 진영 간 이념과 가치 대립, 그리고 선·후진국 간 부의 차이에서 오는 이견을 줄여서 글로벌 컨센서스를 복원하는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중견국가들의 교량 역할과 인도 브라질 등 커지는 글로벌사우스의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가 필요하다.

둘째, 정부 간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도와주는 학계와 지식인의 역할이다. 특히 정부들이 안보와 주권의 전통적 틀을 넘어서게 하는 인간 안보와 책임 주권의 개념 확대를 위한 국제적 공론을 주도해야 한다.

셋째, 실존적 위협 대처를 위한 시민사회의 글로벌 캠페인 전개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국경을 넘어 범세계적 행동을 추구하는 글로벌 시민의식은 물론 자연과의 지속가능한 평화를 추구하는 행성의식이 고취되어야 한다.

이중 어느 것 하나 쉬운 과제는 없다. 작금의 국제 정세에 비춰보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 진단이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합심해서 노력한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유엔 무용론을 넘어선 현실적 개혁 방안

윈스턴 처칠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현실문제와 도전요인 분석에서는 냉철한 비관주의적 시각이 필요하지만 해법의 추구에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낙관주의자의 자세가 바람직할 것이다. 희망을 포기하고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노력을 시도한다면 아무리 낮더라도 성공의 가능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류 전체, 특히 우리 자손 세대의 생존과 번영이 걸려 있는 절체절명의 과제 앞에서 보다 나은 유엔을 만드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유엔 80’이 앞으로의 80년을 기약하는 인류몽이 되어야 한다. 유엔의 도움으로 선진 민주국가로 성장한 한국이 더욱 적극적인 역할로 더 나은 유엔을 향한 인류몽을 주도하기를 고대한다.

김원수 경희대 미래문명원장 전 유엔 사무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