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체모방 기술로 말랑하면서도 단단한 로봇 탄생
재료 하나로 여러 강도 구현해
적응형 로봇 개발 가능성 열려
100kg이 넘는 무게를 감당하면서 때론 한없이 부드럽게 구부러지는 이중적인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근골격계 얘기다.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모두 구현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이를 가능케 하는 생체모방 로봇 기술이 개발됐다. 동물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한 로봇을 하나의 재료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21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즈(Science Advances)’의 논문 ‘생체모방 격자 로봇: 구조 설계로 구현하는 방향별 특성 제어(Lattice structure musculoskeletal robots: Harnessing programmable geometric topology and anisotropy)’는 25킬로파스칼(kPa)에서 300kPa까지 광범위한 강성 범위를 단일 재료로 구현할 수 있음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이는 인간의 지방(1kPa)부터 연골(수십 kPa) 수준까지 생체 조직 상당 범위를 포괄하는 수준이다. 하나의 재료로 말랑한 근육부터 단단한 연골까지 다양한 딱딱함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강성은 힘을 가했을 때 변형되지 않는 힘의 정도다. 쇠막대기는 힘을 줘도 잘 휘지 않는 특성이 있다면 강한 강성을 가진 것이다.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교(EPFL)의 조시 휴즈(Josie Hughes) 교수 연구진은 코끼리 근골격 구조에서 영감을 얻어 단일 재료로 부드러움과 단단함을 모두 구현할 수 있는 로봇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코끼리는 4만개가 넘는 근육으로 이뤄진 유연한 코로 꽃잎을 상하지 않고 집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몸을 지탱하는 강력한 다리를 가지고 있다.
연구진은 종전 로봇이 딱딱하거나 말랑하거나 둘 중 하나의 특성만 가질 수 있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격자 구조’ 기술에 주목했다.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3차원 구조의 배열과 밀도를 조절해 같은 재료로도 다양한 기계적 특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연구진이 개발한 핵심 기술은 두 가지 기본 격자 블록(‘BCC’와 ‘XCube’)을 활용한 것이다. BCC 블록은 모든 방향으로 균등하게 유연한 근육 같은 특성을, XCube 블록은 방향에 따라 다른 강성을 가진 뼈 같은 특성을 보인다.
연구진은 이 두 블록을 활용해 ‘토폴로지 조절(TR)’과 ‘중첩 프로그래밍(SP)’이라는 두 가지 혁신 기법을 개발했다. TR 기법은 두 블록을 점진적으로 섞어 연속적인 특성 변화를 만들고, SP 기법은 여러 블록을 겹쳐 완전히 새로운 특성을 창조한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100만개 이상의 서로 다른 격자 조합이 가능해졌다고 내세웠다.
실제 이 기술이 활용될 수 있을지 코끼리 로봇도 제작됐다. 코끼리 로봇 코 부분은 TR 기법으로 제작했다. 모터 4개만으로도 △비틀기 △굽히기 △나선형 회전 등 다양한 동작들을 구현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또한 0.1mm 두께의 종이부터 100mm 크기의 물체까지 다양한 크기를 자유자재로 잡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몸무게(150g)보다 3배 무거운 물건(500g)도 들어 올렸다.
코끼리 다리 부분은 SP 기법으로 제작돼 자체 무게보다 무거운 4kg의 하중을 안정적으로 지탱한다. 로봇은 3개 다리로 서서 나머지 1개 다리로 공을 차는 동작까지 했다. 종전 로봇으로는 불가능했던 정밀함과 힘을 동시에 구현한 것이다.
물론 이번에 개발된 기술은 개념 증명(Proof of Concept) 단계로 실용화를 위해서는 상당한 추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또한 뼈처럼 매우 단단한 구조는 여전히 구현하기가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에 따라 자동으로 특성이 변화하는 적응형 로봇 개발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는 의미가 있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