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트럼프발 가치혼란, 일본외교의 ‘미국 의존’ 딜레마
일본은 2010년대 이후 미일동맹을 배경으로 인도태평양 안보체제 구축에 앞장서며 대중국 견제를 대외정책의 핵심 과제로 추구했다. 2016년 아베정권이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FOIP)’ 구상을 처음 내놓고 2017년 트럼프 1기 정권이 인도·태평양전략을 공식 채택한 이래 미일은 법의 지배, 민주주의와 자유무역 등 보편가치를 기치로 중국의 무력적인 현상변경 시도를 억제하는 안보협력 강화에 주력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정권이 미일동맹의 기저 가치를 흔들면서 일본의 대미 의존 외교에 모순이 드러나고 있다.
두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미국은 법의 지배에 기반한 국제질서 형성을 주도했고 일본도 미국과 공유하는 인태 전략 하에서 국제법을 특히 중시하는 외교를 전개해왔다. 지난 1월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 후 미국은 국제규범보다는 힘에 의한 평화와 거래를 노골적으로 추진하면서 일본은 곤혹스럽게 됐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과 관련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네타냐후 수상 등을 전범 혐의로 국제체포영장을 발부하자 2월 트럼프정권은 ICC 직원의 미국 내 자산동결 등 제재조치를 발령했다. 법 지배의 표상인 ICC의 125개 가맹국 중 79개국이 공동성명을 통해 제재조치를 비판했으나 현 ICC 재판소장을 배출한 일본은 동참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법의 지배 교란에 대한 침묵으로 일본외교가 이중 잣대를 쓴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트럼프 동맹경시, 일본 안보 큰 위기
트럼프의 동맹경시는 일본 안보에 커다란 위기다. 센카쿠열도 대만해협 남중국해 등에서 중국의 군사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미국 인도 호주와 4국협력 틀(쿼드, QUAD)을 중심으로 군사훈련과 정보공유 등 협력을 강화해왔다. 한국 필리핀도 포함한 중층적 양자·소다자 안보협력도 추진해왔다.
우크라이나전쟁 이후 유럽과 인태지역의 안보위기가 연계되면서 일본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협력하고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군함과 해상자위대 간 합동훈련도 실시해왔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게 동맹의무 후퇴와 부담 증대 압박을 공언하고, 쿼드 회원국 인도는 관세갈등 등으로 미국과 불협화음을 내며 중국에 접근, 인태지역 안보협력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지속적 인태 관여를 확보하려고 지난 3월 미국에 ‘하나의 전역(One Theater)’ 구상을 제안했다. 이 구상은 동중국해와 한반도를 일체화된 전역으로 파악해 미일이 호주 필리핀 한국 등과 연계협력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트럼프정권이 이런 동맹결속 구상보다는 미국의 피해만을 강조하고 엄격한 요구를 계속 내밀자 일본 방위성 내에서조차 미국에 대한 환멸이 일고 “이때가 자주 방위의 호기”라며 핵무장까지도 거론된다. 물론 미국 군사력에 의존해온 일본이 그럴 만한 의지와 능력이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관세폭풍이 초래한 자유무역 위축에 일본의 고심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트럼프의 압박으로 일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상호관세 15%와 5500억달러 현금 투자에 일단 문서로 합의했다. 대미 의존 체질 때문에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수용했지만 미국에 대한 신뢰는 깨지고 반감도 쌓인 듯하다.
자유무역 후퇴를 우려한 일본은 미국을 빼고서라도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 파트너십(CPTPP)의 확대와 유럽연합(EU)과의 연계 강화를 통해 자유무역의 유지·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이런 대안도 대미 반발을 이용해 자국 주도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중국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의 대외원조 삭감 역시 일본외교에게는 충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공식 폐쇄했다. 동남아국들에 대한 원조가 중단 내지 급감하면서 대미 불신·반감이 증폭되고 그 틈새에 중국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동남아에서 중국세력권화를 막고자 아세안 탄소제로공동체(AZEC), 아세안 송전망구축 등 개발협력에 공들여온 일본으로선 난감한 상황이다. 미국이 빠진 공백을 메우려면 원조를 더욱 늘려야 하지만 일본 내 대외원조 회의론이 걸림돌이다.
독자 군사대국화냐, 중국과 융화추구냐
트럼프 2기의 미국 제일주의가 동맹국들에게 준 충격과 혼란은 흡사하다. 일본은 미일 동맹에 의존한 대중 억제를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추구해온 만큼 충격은 더 크다. 과거 미일은 안보·경제 갈등 속에서도 법치와 자유무역 가치에의 공감대는 유지되었으나 이번엔 가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이제 일본에는 전후 체질화된 대미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화두가 던져졌다. 독자적 방위력을 갖춘 군사대국화냐 중국과 융화추구냐는 특히 우리가 주시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