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 마지막 아베노믹스 종료 돌입
지난해 이후 금리인상 국채매입 축소 이어 ETF 매각 결정 … “증시 영향은 제한적”
일본은행은 19일 보유하고 있는 상장지수펀드(ETF)를 내년부터 연간 3300억엔(약 3.1조원)씩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일본은행이 보유한 ETF 장부가격 기준(37조엔)을 고려하면 전량 매각에 걸리는 기간은 112년이다.
일본 언론은 이번 결정으로 아베노믹스의 한축인 금융완화정책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평가했다. 막대한 유동성 공급을 통해 장기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려는 일본정부와 중앙은행의 정책실험이 10여년 만에 끝났다는 의미다.
중앙은행이 기업의 대주주
일본은행이 ETF를 매입하기 시작한 때는 2010년부터다. 당시 시라카와 마사아키 총재는 금융완화의 일환으로 시장에서 ETF를 매입했다. 당초 미미한 수준이던 매입 규모는 2013년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취임하면서 빠르게 증가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임명한 구로다 총재는 2013년 이른바 ‘차원이 다른(異次元) 금융정책’을 내걸고 시장에 무제한 유동성 공급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구로다 총재 취임 전 1조엔 수준이던 일본은행의 ETF 보유액은 매입가 기준 2016년 6조엔, 올해는 37조엔(약 350조원)까지 급증했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기업 주식에 분산투자하는 ETF를 대량으로 보유하면서 사실상 대주주가 된다는 점이다. 일본 증시에서 일본은행이 보유한 시가총액은 전체 ETF 시장의 80%, 전체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에 육박한다.
닛세이기초연구소 추산에 의하면 현재 일본은행이 보유한 ETF 규모는 19일 기준 시가총액 85조엔(약 800조원)으로 추산된다. 이는 도쿄증시 프라임시장 시가총액(1080조엔)의 7.9% 수준에 이른다. 국민연금을 관리하는 연금적립금관리기구(GPIF)가 일본 증시에서 보유한 64조엔 규모를 넘어서는 사실상 제1대 주주에 해당한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했다.
일본은행이 ETF를 통해 주식 10% 이상 보유한 개별 기업은 70개 이상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어드벤티스트(25.1%)와 TDK(20.5%)는 20%를 넘었고, 닛토전공(19.3%)과 닛산화학(18.7%) 등도 20%에 육박했다.
중앙은행이 이처럼 막대한 양의 주식을 보유하면서 시장왜곡도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실적이 악화되고 미래가치가 불투명한 기업의 주가를 떠받쳐주고 경영권도 방어해 주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문제다.
도리이 유스케 메이지대학 교수는 “(ETF 매입은) 실적이 저조한 기업의 주가를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고, 주식시장의 가격결정 기능을 저하시킨다”며 “주식을 보유한 기업의 의결권 행사도 운용회사에 맡기고 있어 이들 기업의 사실상 경영권 방어에 활용된다”고 지적했다.
일본증시 ETF 매각 결정에 장중 급락
일본은행이 19일 ETF를 매각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자 시장은 요동쳤다.
도쿄증시는 이날 개장과 함께 닛케이평균지수는 500포인트 이상 오르면서 장중 최고치인 4만5852.75까지 상승했다. 하지만 일본은행이 이날 오후 1시쯤 ETF 매각 결정을 발표하면서 시장은 급변했다. 오후 1시 19분쯤 장중 최고점 대비 1300포인트 이상 하락하기도 했다. 결국 이날 닛케이지수는 전날 종가 대비 257.62포인트(-0.57%) 하락한 4만5045.81로 마감했다. 시가총액 1위인 도요타는 전날 대비 17.5엔(0.60%) 하락한 2923.0엔으로 마감했다.
이번 결정으로 일본 증시에 미칠 영향이 주목된다. 일본은행은 시장에 미치는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우에다 가즈오 총재는 기자회견에서 “(보유 ETF의 전량 매각에는) 단순 계산하면 100년 이상 걸린다”며 “시장에 혼란을 주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조금씩 처분해 나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본은행은 ETF 처분과 관련 △적절한 가격을 통한 매각 △일본은행의 손실 회피 △시장에 주는 파괴적 영향의 회피 등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아사히신문은 “일본은행은 스스로 경험을 가지고 있다”며 “금융기관에서 사들인 주식을 2016년부터 올해까지 매각하면서 금액을 시장 전체의 0.05% 정도로 조정해 파장을 줄였다”고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19일 주식시장은 일시적으로 급락했다 하락폭을 줄였다”면서 “향후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고 전했다.
향후 연간 매각금액을 시가 기준 6200억엔(약 5조8000억원)으로 제한해 전체 시장 거래액의 0.05%로 조정할 계획이다. 이시바시 다카유키 골드만삭스증권 바이스프레지던트는 “연간 수조엔 단위로 시행하는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등에 흡수될 것”이라며 “주식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제한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도쿄증시는 22일 개장과 함께 상승해 이날 오전 9시 6분 현재 전날 종가보다 443.29포인트(0.98%) 오른 4만5489.10에 거래되고 있다.
다만 일본은행이 간접적으로 주식을 다수 보유한 기업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이다. 실제로 보유비중이 높은 TDK는 19일 전날 종가 대비 71.0엔(-3.29%) 하락한 2089엔, 컴시스홀딩스는 전날보다 74엔(-1.98%) 내린 3667엔으로 마감했다. 스즈키 마사히로 다이와증권 수석애널리스트는 “보유비중이 높은 기업의 주식은 ‘역일본은행 트레이드’가 생길 우려도 있다”고 내다봤다.
아베-구로다식 유동성 공급 막내려
일본은 2012년 12월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돈풀기에 나섰다. 이듬해 4월 아베 총리가 임명한 구로다 당시 일본은행 총재는 이른바 ‘차원이 다른 금융완화정책’을 통해 통화·금융정책의 틀을 완전히 바꿨다. 장기간 디플레이션에 빠진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물가안정목표(2%)를 조기에 실현해야 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우선 통화정책 수단을 기존 무담보 콜금리 조정을 통한 금융시장 개입에서 통화량을 조정하는 것으로 바꿨다. 이에 따라 일본은행은 연간 약 60조~70조엔 수준의 통화량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여기에 장기국채 매입과 ETF 및 부동산REIT까지 사들여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했다.
특히 장기국채 수익률을 일정한 수준(연 0.5% 안팎)에서 묶어두기 위해 10년물 국채를 중심으로 대거 매입했다. 현재 일본은행이 보유한 일본국채 총액은 매입가 기준으로 올해 3월 현재 576조엔에 달해 전체 국채 발행 잔액의 51.7%를 차지한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2023년 이후 소비자물가가 급등하면서 아베노믹스의 이른바 ‘세개의 화살’ 가운데 하나인 금융완화정책을 긴축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해 3월 마이너스 금리와 장단기금리조작(YCC) 정책을 중단했다. 이에 따라 2016년 이후 계속된 마이너스 금리는 중단됐고, 올해 1월 이후 연 0.50%의 단기 기준금리가 지속되고 있다.
아울러 지난해 8월에는 국채 매입규모와 잔액을 줄이는 사실상의 양적긴축도 개시했다. 신규 ETF 매입도 지난해 3월 이후 중단했다. 따라서 이번 보유한 ETF 매각 결정은 마지막 남은 금융완화정책의 마감을 의미한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0일 사설을 통해 “일본은행이 금리인상 기조와 국채보유 축소에 이어 ETF의 매각으로 금융정책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며 “금융완화정책의 최종 출구를 향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일본은행은 19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금리인상 기조를 지속한다는 방침을 확인했다. 우에다 총재는 “경제와 물가동향을 지켜보면서 계속해서 정책금리를 올리고, 금융완화 정도를 조정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이르면 10월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현행 0.50%에서 0.25%p 가량 인상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도쿄리서치에 따르면 19일 오후 기준 10월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올릴 것이라는 관측이 56%를 차지했다. 12월 전망치는 23%를 보였다. 10월 인상 전망이 상승한 데는 이날 일본은행 회의에서 2명의 심의위원이 금리인상을 주장한 것이 알려지면서다.
재정확대 정책은 진행중
아베노믹스의 다른 한축인 '기동적인 재정출동'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하다. 자민당 내에서 재정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큰 방향은 비슷하지만 적극 확장파와 건전파의 대립은 이어지고 있다.
다음달 4일 예정된 총재선거를 앞두고 '2강'으로 분류되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상은 19일 출마선언에서 '책임있는 적극 재정'을 강조하며 재정확대 의욕을 드러냈다. 다카이치는 '여자 아베'로 불릴 정도로 아베 전 총리의 정책 계승에 적극적이다.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은 재정건전파에 속한다. 고이즈미는 20일 출마선언에서 재정 관련한 직접적인 발언은 없었지만 평소 재정규율을 중시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