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바꾼 공정위…소상공인·중소기업 권익보호에 무게
주병기 위원장 취임 열흘 만에 가맹점주 권익강화 종합대책 발표
점주단체와 협의거부한 본사는 검찰 고발 … 일괄협의절차 마련
화물연대 고발하고 대기업 방어권 보장한 한기정과는 반대 행보
주병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의 첫 행보는 자영업자·중소기업 권익보호였다. 첫번째 정책으로 가맹점주 권익강화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첫 일정 역시 중소기업계와의 회동이었다. 향후 주 위원장의 정책기조가 ‘갑을관계 해결’에 무게가 실릴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읽힌다.
‘주병기 공정위’의 이런 기조는 윤석열정부 한기정 전 공정위원장과는 정반대다. 한 전 위원장은 취임 뒤 수년째 추진 중이던 플랫폼법 제정을 백지화하고 ‘자율규제’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플랫폼 자율규제는 2년여 시간만 끌다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오히려 주로 대기업인 조사 대상자들의 항변권을 보장하는 데 힘을 쏟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또 임기 초 화물연대의 파업을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몰면서 논란을 자초했다. “경제적 약자를 보호할 유일한 정부기관인 공정위 정책이 거꾸로 가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공정위가 검찰로 넘긴 ‘화물연대 사건’은 결국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면서 체면을 구겼다.
◆갑을분야에 힘 싣는다 = 24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주 위원장은 전날 서울 마포구 한 패스트푸드 가맹점에서 가맹점주 권익 강화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가맹점 창업부터 폐업까지 전 단계에서 점주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내용이 골자다. 종합대책에는 △협의거부 가맹본부에 대한 형사제재 신설 △가맹점주단체 등록제 도입 △정보공개에서 공시제로 전환 △1+1 직영점 운영의무 강화 △계약해지권 보장과 갱신 통지 의무 부과 등을 담았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점주단체 협상력 강화를 위한 법적근거 마련이다. 현행 가맹사업법은 단체 구성권과 협의 요청권을 인정했지만, 협의 거부 시 제재 수단이 없었다. 이때문에 협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 21대 국회에서 이번 대책과 비슷한 취지의 법 개정이 추진됐지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당시 공정위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해당 법안이 단독 처리되자 “관련 산업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내놔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대책에서 공정위는 협의명령을 내린 뒤에도 협의를 거부하는 가맹본부를 검찰에 고발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다만 점주단체의 협의요청권 남용 방지를 위해 단체별 요청 횟수를 제한하고,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협의 거부가 가능하도록 규정할 계획이다. 같은 안건에 대해 여러 점주단체와 반복해 협상하지 않도록 일괄 협의절차도 마련한다.
◆정보공개 공시제 도입 = 또 창업 과정에서 가맹본부가 필요한 정보를 생애주기순으로 제공하도록 하는 ‘정보공개서 공시제’를 도입한다. 정보공개서는 그동안 시·도·공정거래조정원의 심사를 거쳐 가맹 희망자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사전 심사기간이 길어 가맹 희망자들이 원하는 정보를 적시에 얻지 못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사전 심사 없이 가맹본부가 정보공개서를 공시의 형태로 공개하도록 할 방침이다. 다만 정보공개서 공시는 ‘변경 등록’을 하는 경우에만 적용되며, 처음 등록하는 가맹본부의 정보공개서는 기존과 같은 사전 심사를 거쳐야 한다. 가맹본부가 허위로 공시하는 경우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 허위 공시에 대한 과태료 상한도 기존 1000만원보다 올리는 안이 추진된다.
폐업 시에는 가맹점주의 ‘계약해지권’을 가맹사업법에 명문화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계약해지권은 기존에도 상법에 근거가 있지만 규정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공정위는 구체적인 사유와 절차 등을 포함한 계약해지권을 규정해 과도한 위약금 부담 없이 가맹점주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다만 계약준수 원칙을 벗어나는 만큼 해지 사유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제한한다.
가맹점주가 계약을 체결하면서 위약금 정보를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정보공개서에 ‘중도해지 가맹점의 평균 영업위약금 부담액’도 추가하기로 했다. 가맹본부가 불필요한 품목 구매를 강요하는 등의 부당행위는 법 집행을 강화하기로 했다.
가맹본부가 특정 점주단체로부터 협의를 요청 받은 경우 타 점주단체에 그 협의절차에 참여할 것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해당 점주단체가 참여를 거부하면 협의 대상 주제에 대해 가맹본부와 협의를 거친 것으로 간주할 계획이다.
◆현장행보도 자영업자·중소기업 우선 = 주 위원장은 취임 이후 갑을 분야 문제 해결을 위한 현장 행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18일에는 취임 후 첫 공식일정으로 중소기업계를 찾아 중소기업·소상공인의 현장 애로를 들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공정위에 납품대금 연동제 입법 보완과 함께 제도개선 건의과제 17건을 전달했다.
주 위원장은 “중소기업의 안정적 경영환경과 공정한 경쟁 조건을 보장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2일에는 하도급대금 연동제 도입 이후 처음으로 연동제를 위반한 한일시멘트·시몬스·시디즈를 제재하기도 했다.
오는 25일에는 벤처기업들과 만나 기술탈취 관련 현장 간담회를 진행할 예정이다.
미국과의 통상 마찰이 우려되는 플랫폼법과 관련해서도 갑을 문제를 다루는 거래공정화법을 분리해 우선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공정경쟁촉진법의 경우 구글이나 메타 등 미국 기업이 제재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플랫폼 기업과 입점업체나 소상공인과의 갑을문제를 다루는 거래공정화법은 상대적으로 통상마찰 시비에서 벗어나 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