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기후위기 시대, 전쟁의 두 얼굴

2026-03-18 13:00:02 게재

전쟁은 생명을 파괴하는 가장 참혹한 행위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전쟁의 또 다른 얼굴을 점점 더 분명히 목도하고 있다. 그것은 지구환경과 기후에 남기는 전쟁의 파괴적인 흔적이다. 전쟁의 상처는 사람을 죽이고 도시를 무너뜨리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군사작전에 사용되는 무기와 연료는 대기와 물, 숲과 토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파괴한다. 지금 중동과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개의 전쟁은 지구에 가해지는 가장 야만적인 파괴 행위가 바로 전쟁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전쟁은 ‘군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대기 중 탄소농도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기후사건’이기도 하다. 화석연료 시대의 무력충돌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탄소배출로 이어진다. 전투기와 군함, 탱크 등 무기체계 운용과 군수물자 수송은 세계에서 가장 에너지 집약적인 활동 가운데 하나다.

전투기 1대가 단 1시간 비행으로 배출하는 탄소는 일반 승용차가 700시간 넘게 운행하면서 내뿜는 양과 맞먹는다. 군대와 방위산업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세계 배출량의 약 5.5%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군대가 하나의 국가라면 세계 네 번째 수준의 배출국에 해당하는 규모다.

문제는 이런 현실이 국제 기후 거버넌스 체계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유엔기후변화협약과 파리기후협정은 평시 배출 감축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군사 부문 배출은 여전히 보고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고, 전쟁이 수반하는 배출 역시 별도의 항목으로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전쟁은 단기간에 막대한 양의 탄소를 배출하지만 그 책임과 감축 의무는 제도적 공백 속에 놓여 있다.

전쟁이 에너지전환 촉발시키는 역설

국제인도법 역시 기후에 미치는 전쟁의 장기적인 영향까지는 포괄하지 못한다. ‘광범위하고 장기적이며 심각한 환경피해’를 금지하는 규정은 존재하지만 탄소배출이나 기후 시스템 악화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묻는 구조는 아니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환경파괴를 전쟁범죄로 다루자는 ‘에코사이드’ 논의가 확산되고 있지만 아직 법적 구속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전쟁과 기후변화 사이에 명백한 인과관계가 존재함에도 법과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전쟁의 영향은 단순히 탄소배출 증가에 그치지 않는다. 에너지가격 급등과 공급 불안정을 초래하며 국제 에너지시장에 즉각적인 충격을 가한다. 지정학적 불안이 일시적 가격변동을 넘어 글로벌 탄소중립 경로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전쟁은 단기적으로 화석연료 생산과 소비를 늘리고 에너지안보 논리를 강화한다. 그 결과 탄소배출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전쟁이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역설이 나타나기도 한다. 지정학적 충돌이 새로운 에너지 체제의 출현을 이끈 사례는 적지 않다. 1970년대 중동의 정치·군사적 갈등이 촉발한 오일쇼크는 서구 국가들과 일본이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연합이 ‘리파워EU’ 정책을 통해 재생에너지 확대를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반도는 군사적 긴장이 상존하는 지역이다. 동시에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고 인구와 산업이 연안에 집중되어 있다. 지정학적인 충격과 기후재난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이중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안보개념은 군사력과 국경 방어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왔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의 위협은 슈퍼태풍, 홍수, 폭염, 초대형 산불, 식량 가격 폭등, 대규모 기후난민의 이동과 같은 비군사적인 요인에서 발생한다. 총보다 폭염이 더 많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시대라면 안보의 우선순위 역시 달라져야 한다.

에너지안보와 기후정책 사이의 균형 중요

에너지안보와 기후정책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도 중요하다. 전쟁과 지정학적 갈등이 확대될수록 두 과제를 분리해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략으로 통합해야 한다. 중동의 불안은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라 화석연료 중심 세계 질서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에너지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국가는 탄소중립과 에너지 전환을 ‘부담’이 아니라 ‘보험’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다. 반면 에너지 구조는 설계의 문제다. 탄소중립은 평화로운 시기에만 가능한 이상주의 프로젝트가 아니다. 오히려 불안정한 세계에서 국가의 회복력과 자율성을 높이는 현실적인 전략이다. 전쟁이 부른 위기를 화석연료 체제의 연명 장치로 삼을 것인지, 아니면 전환의 가속기로 삼을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안병옥 전 환경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