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임죄 없애고 경미한 경제형벌은 과징금·과태료로 전환 추진

2025-09-30 13:00:01 게재

당정 ‘경제 형벌 합리화 1차 방안’ … 6000개 형벌 규정 중 30% 정비

최저임금법에 사업주 면책 마련 … 형사처벌 대신 금전적 제재 부과

정부가 70여년 만에 형법상 배임죄를 폐지하고 대체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과도한 형벌로 기업 경영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하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운영 철학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다.

정부는 나아가 6000여 개에 달하는 경제 형벌 가운데 불합리한 형사 처벌 조항을 행정 제재로 개편, 합리적인 법질서를 구축할 방침이다. 다만 야당은 배임죄 관련 문제로 재판을 받는 이재명 대통령을 구하기 위한 법 개정이라며 반발, 진통이 예고됐다.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경제형벌 민사책임 합리화TF 당정협의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동수 기자

◆정기국회 일괄개선 추진 =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30일 당정협의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경제 형벌 합리화 1차 방안’을 발표했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7월 같은 취지로 경제형벌로 기업활동이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며 경제형벌 합리화 방안을 주문한 바 있다. 정부는 이 대통령 지시에 따라 지난달 초부터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며 전 부처에 걸쳐 개선 과제를 발굴했다. 그 결과 신속한 추진이 가능하고, 국민 체감도가 높은 110개 형벌 규정을 우선 개편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번 정기국회 임기 내에 개정안을 일괄적으로 제출할 계획이다. 향후 1년 이내에 전체 형벌 관련 규정의 30%를 정비한다는 게 정부 목표다.

정부는 ‘5대 원칙’에 근거해 정비 대상을 선정했다. △범죄 사실에 비해 형벌이 과도하지 않은지(책임성) △시대 변화에 따라 불필요하지 않은지(시의성) △형벌 외 수단으로 법익 보호가 가능한지(보충성) 여부 등을 따졌다. 해외 사례와 비교해 국내 법체계의 적정성도 검토했다.

논의 결과 배임죄는 폐지하기로 결론 났다. 범죄 요건이 모호하고, 적용 범위가 넓어서 기업의 경영활동을 침해한다는 지적을 수용한 결과다. 그러나 정부는 배임죄를 없애는 대신 대체 법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배임죄를 아예 폐지할 경우 범죄 처벌의 공백이 생긴다”며 “현행 배임죄보다 요건을 명확히 하고, 처벌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특별법 제정이나 개별법 개정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최근 5년간 배임죄 1심 선고 판례 3300건을 분석했더니 32개의 범죄 유형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해당 범죄를 규율할 수 있는 형태의 법안이 제안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배임죄가 폐지된다면 1953년 첫 제정 이후 70여년 만에 처음으로 형법에서 배임죄가 사라지게 된다.

◆배임죄 법제화까지는 시간 걸려 = 다만 배임죄 폐지 문제의 경우 대체입법에 관한 기존 연구가 많지 않아 법제화까지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그동안 여야의 공방이 예상된다. 앞서 국민의힘은 “배임죄 폐지는 이재명 대통령의 방탄용”이라며 공세를 펼쳤다. 이 대통령은 당선 전 ‘대장동 개발 의혹’ 등으로 배임 혐의로 기소돼 재판받아 왔다.

선의의 사업주를 보호하는 장치도 생긴다. 대표적으로 최저임금법 관련 처벌 조항에 면책 규정이 마련된다. 이렇게 되면 사업주가 상당한 주의·감독을 했을 땐 법을 위반해도 형사처벌은 피할 수 있다. 과거 노동조합법이 양벌규정에 사업주의 면책 규정이 없어 위헌 결정을 받은 바 있다.

형벌 대신 과징금이나 과태료를 활용한 금전적 제재를 부과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화물 트럭 소유자가 지방자치단체의 승인을 받지 않고 차량을 개조한 경우 자동차관리법에 따라 지금은 징역 1년 이하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는데, 앞으로는 시정명령과 함께 과태료를 최대 1000만원까지 부과하기로 했다.

또 배달로봇 등 실외이동로봇의 부품 등 경미한 사항을 사전 승인없이 개조한 경우 징역·벌금형이 규정됐지만, 아예 형벌을 폐지하는 대신 최대 5000만원의 과징금을 물릴 계획이다.

아울러 중소기업·소상공인이 경미한 행정의무만 위반해도 형벌을 적용했던 규정에 대해서는 행정제재인 과태료를 매기는 방안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특히 38개 법률, 68개 경제형벌 규정이 여기에 포함돼 이번 110개 과제 중 가장 수가 많다.

또 즉시 형벌을 내리기보다 시정명령·원상복구명령 등 행정조치를 먼저 부과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에만 처벌하는 선(先)행정조치-후(後)형벌부과 방안도 9개 법률, 18개 규정에 걸쳐 마련했다. 페인트 제조업체 등이 유해화학물질 취급시설을 운영하면서 정기검사를 받지 않았거나, 버스업체가 인가없이 노선 변경 등을 한 경우 등이 행정조치를 통해 먼저 개선 기회를 제공할 사례로 꼽혔다.

정부는 이날 발표한 개선안과 관련된 법 규정들을 일괄개정하기 위해 정기국회 회기 중 입법안을 제출하고, 다음 달 중 추가 개선방안을 마련, 발표할 예정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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