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가 된 최창걸 명예회장의 몇 가지 일화
‘비철금속 거목’ 최창걸 명예회장 타계
34세에 사업에 뛰어들어 50년을 고려아연과 함께한 최창걸 명예회장(1941~2025년)이 6일 타계했다. 회사 창립멤버로서 유일하게 현직에 남아 있던 최 명예회장과 고려아연의 몇 가지 일화가 다시한번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고려아연 창립, 꿈을 향한 전초전 = 최창걸 명예회장은 1973년 10월 미국에서 MBA와 3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영풍광업에서 재무·회계 업무를 맡았다. 그렇게 8개월여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 1973년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고려아연이 제련업종을 담당하는 회사로 선정됐다.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수출품은 가발이나 섬유 정도에 국한했다.
그렇게 시작한 비철금속 제련사업. 최 명예회장에게 사업을 운영하라는 제안이 있었고, 최 명예회장은 정부와 금융회사 등 여러 관계자와 수없이 만나 협의한 뒤 1974년 8월1일 단독 회사 고려아연을 설립했다. 기술과 자금, 경험 없이 시작하기엔 버겁고 큰 규모의 사업이었지만 ‘도전’이라는 단어가 주는 용기와 힘을 믿고 열정적으로 헤쳐 나갔다.
하지만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최 명예회장은 국내에선 국민투자기금과 산업은행 등으로부터 돈을 빌렸고, 수소문해보니 IFC(International Finance Corporation, 후진국 민간기업에 투자하고 자금을 빌려주는 세계은행 산하 국제기구)를 알게 됐다.
IFC에서 사업자금으로 7000만달러(약 980억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5000만달러에 해낼 수 있다 설득했다. 아울러 5000만달러를 부채 60%, 자기자본 40% 비율로 맞춰 오라는 부분도 7:3으로 협상했다. IFC에서 1300만달러를 빌려주고, 400만달러를 자본금으로 투자했는데 당시 IFC에서 투자한 민간기업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부족한 자금으로 건설을 시작하려니 턴키방식은 어려웠다. 당시 국내에는 제련소 건설경험이 있는 종합건설회사도 별로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 해외 건설사들은 보통 턴키계약을 했는데 건설사 마진이 30%가 넘었다. 그래서 그는 턴키계약이 아닌 직접 구매에서 건설까지 하는 방법을 택했고, 모든 걸 내 손으로 해보겠다는 그의 선택은 비용 절감뿐만 아니라 노하우와 기술까지 익히게 되는 ‘신의 한 수’가 됐다.
7000만달러를 생각했던 IFC의 예상을 뒤엎고 4500만달러로 공사를 완성한 건 분명 ‘신의 한수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돈을 아끼느라 큰 건설회사와 계약하지 않고 수십 개의 단종면허 토목공사업체와 건건이 계약한 결과였다.
◆“손에 쥔 재산은 믿지 마라” = 최 명예회장은 아버지인 최기호 선대회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선대회장은 당시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지금의 고등학교까지 밖에 나오지 못하고,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주위에 부잣집 아들이 많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지금의 휴전선 아래로 넘어오면서 재산을 모두 잃었다. 이 이야기를 최 명예회장에게 전하며 아무리 돈이 많아도 재산을 잃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손에 쥔 재산은 언제든 잃을 수 있지만 머리에 든 재산은 절대 잃지 않는다고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최 명예회장은 “기업이 성장을 멈춘다는 것은 사람으로 치면 죽는 것이라고, 회사도 사람처럼 노화 방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성장을 멈추지 않고 진화하는 기업만이 100년을 가는 기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해왔다.
그는 지난 2014년 고려아연 창립 40주년을 맞아 직원들에게 “나는 혁신이나 개혁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매일매일 조금씩 발전해 나가면 한꺼번에 큰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 개혁보다는 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원 불모지인 대한민국에 ‘세계 넘버원 비철금속 기업’ 고려아연을 만든 그의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