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관세협상 - 국제질서 재편 속 전략적 자율성 틈을 열어라
한미 관세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철강 자동차 배터리 등 핵심산업 전반에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번 협상은 단순한 세율조정의 문제가 아니다.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하며 그 핵심은 거래의 기술이다. 이 변화를 위기가 아닌 새로운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오늘날 국제질서는 이념 중심에서 경제적 실익과 기술패권으로 이동했다. 공급망 위기와 자국 우선주의 속에서 신뢰는 쉽게 흔들리고 이해관계가 바뀌면 관계는 즉시 재조정된다. 상호의존성은 남았지만 그 연대는 느슨하고 불안정하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이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할 현실적 기회를 제공한다. 관세협상을 ‘압박의 장’이 아닌 ‘거래의 장’으로 바꿀 수 있는 시점이다.
새로운 구조 속에서 미국은 더 이상 동맹국과 전략적 파트너들을 일방적으로 지휘하지 못한다. 각국은 자국 중심의 선택을 교차시키며 이해득실에 따라 거래의 폭을 넓히고 있다.
인도의 행보가 대표적이다. 모디 총리는 중국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는 참석했지만 이틀 뒤 베이징 전승절 기념식에는 불참했다. 경제적 실리에는 관여하되 정치·이념적 결속에는 선을 긋는 계산된 외교였다.
인도는 미국과 안보협력(쿼드, iCET 등)을 이어가면서도 중국이 주도하는 경제협의체에는 실리를 위해 참여한다. 미국 역시 인도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도 트럼프가 모디에게 생일 축하전화를 건 것은 인도의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조정하려는 계산된 행보였다.
국제질서 불안정, ‘거래의 장’으로 바꿀 기회
미중 협상도 유사하다. 미국은 중국산 제품에 대해 평균 55%의 고율 관세를 유지하면서도 이를 ‘양호한 현상유지(good status quo)’라고 평가했다. 동시에 틱톡 매각, 반도체·희토류 거래, 중국의 대두 수입 확대 같은 전략적 현안을 함께 논의했다.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균형 속에서 각국은 거래의 여지를 넓히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단순화된 정책 결정 구조가 특징이다. 1기 때의 완충장치인 ‘어른들의 축(axis of adults)’은 사라지고 마가(MAGA,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정치구호가 정책을 직접 견인한다. 정책결정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 불안정성은 오히려 한국의 협상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미국 내부의 제약도 분명하다. 국방·안보 분야 투자는 법적·행정 절차와 공급망 안정성 평가가 필수다. 관세정책은 법원에서 위헌 논란에 휘말려 있고 의회는 산업보조금과 예산 문제로 분열되어 있다.
지난 3월 한국이 민감국가로 지정된 것은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안보와 산업을 분리해 대응한 과거 전략 부재의 결과였다. 한국은 이러한 구조적 제약을 활용하되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이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내년 중간선거까지 불확실성은 이어지고 이후 남은 임기는 트럼프가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압축하는 시기가 될 것이다.
한국의 대응은 단순한 경제논리에 머물 수 없다. 재무와 산업의 투트랙을 넘어 군사안보와 북한 문제까지 포괄하는 ‘투트랙+알파’ 접근이 필요하다. 최근 한미 원자력협정 논의도 그 연장선이다. 안보자산을 경제적 실리로, 경제협력을 전략적 영향력으로 전환하는 운영의 묘가 중요하다.
대미 투자는 우선순위를 정해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안보와 직결된 핵심 분야를 먼저 제시하고 이에 상응한 금융안정 조건을 병행해야 한다. 정부는 전면에서 협상을 주도하되 산업의 논리와 데이터가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적 공감대가 중요하다. 조지아 사태에서 보듯 경제안보 충격은 빠르고 직접적으로 국민에게 다가온다. 국민적 지지와 공감이 있을 때 강력한 협상력이 생긴다. 조지아 사태에서도 미국 내 여론이 움직였고 트럼프가 이를 의식할 정도였다.
자율성 기반 ‘거래의 기술’ 발휘할 때
국제질서의 재편은 위기가 아니라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이다. 기존 국가 간의 구조가 느슨해지고 이해관계가 수시로 재조정되는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독자적 공간을 확보할 시점이다.
감성보다는 냉정한 계산으로,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거래의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국내적 결속 위에 현실적 거래의 기술이 발휘될 때 한국은 험난한 경제안보의 파도를 넘어 독자적 생존 전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