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정치구조 향방 결정할 내년 총선

2025-10-10 13:00:01 게재

총리교체 후 혼돈 지속 … 정당간 경쟁, 전통 권력, 외교·안보 변수 맞물린 복합구조

2025년 5월 말 발생한 태국-캄보디아 국경분쟁은 단순한 외교 사건을 넘어 정치 지형을 뒤흔든 전환점이 됐다. 충돌이 격화되는 가운데 프어타이당의 패통탄 친나왓 총리를 둘러싼 외교 논란과 국정 불신이 확산되며 퇴진 압박이 거세졌다.

헌법재판소는 7월 1일 패통탄 총리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8월 29일 해임을 확정, 내각 전체가 물러났다. 프어타이당 중심 체제는 붕괴했고 쁘라차촌당이 품짜이타이당을 지원하되 연정에는 참여하지 않으며 정치구도가 급변했다.

결과적으로 품짜이타이당이 주도하는 새 연립정부가 출범했고 2026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지형은 재편되기 시작했다. 현재 하원 500석 중 쁘라차촌당 142석, 프어타이당 131석, 품짜이타이당 69석이며 나머지 정당은 40석 미만으로 세력이 분산돼 있다.

아누틴 체제, 취약한 권력기반의 한계

패통탄 퇴진 이후 등장한 아누틴 찬위라꾼 총리 체제는 출범 직후부터 안정적인 통치 기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구조적 제약에 직면했다. 품짜이타이당과 아누틴 총리는 대중적 지지보다 제1당 쁘라차촌당의 전략적 지원에 크게 의존해 연정 내 주도권 확보가 쉽지 않다.

품짜이타이당은 전통적으로 왕실·군부와 협력하며 정권 안정성을 유지해왔으나 정책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고,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군부와 관료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아누틴 총리가 국경 분쟁 대응을 군에 전적으로 맡기겠다고 밝히면서 ‘정치적 주도력 부재’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부 운영의 핵심 변수는 의회 역학이다. 쁘라차촌당이 최대 의석을 보유한 상황에서 주요 법안 통과나 개헌 논의는 이들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총리의 정책 선택 폭을 좁히는 구조적 한계로 작용한다. 더불어 군부 사법부 등 전통 권력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현실은 정책 추진 속도와 방향을 제약한다. 국경 분쟁과 경기 불안이 겹치며 국민 여론이 단기적 안정과 위기관리에 집중되는 분위기 속에서 아누틴 정부는 혁신보다 타협과 관리 중심의 국정 운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태국 방콕 정부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는 패통탄 친나왓 총리. 2025년 8월 29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이날 캄보디아 접경 문제 관련 통화가 헌법을 위반했다며 직무정지 중이던 패통탄 총리를 파면했다. 신화=연합뉴스

프어타이당, 전통과 혁신의 이중과제

아누틴 체제 출범과 함께 프어타이당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됐다. 패통탄 총리 퇴진과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재수감으로 당의 동력도 크게 떨어졌다. 탁신은 재임 중 부패·직권남용으로 비판받았고 2023년 귀국 직후 구금됐다. 이후 가석방되었으나 형 집행 중 병원 입원이 법적근거 없이 이뤄졌다는 논란이 불거졌고, 2025년 대법원은 이를 형 집행 회피로 판단해 다시 1년 복역을 명령했다. 왕실모독죄는 1심 무죄에도 항소 여부에 대한 최종 판단이 검찰총장에게 남아 있어 정치적 불확실성이 여전하다. 그럼에도 프어타이당은 여전히 ‘탁신 정치’의 상징성을 활용해 지지층 결집을 시도한다. 탁신의 전 부인 폿짜만 다마퐁이 정치 전면에 복귀했고 청년 정치인 육성 프로그램(Pheu Thai YPP)을 통해 세대교체도 추진 중이다. 하지만 탁신계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해 완전한 ‘포스트 탁신’ 전환은 과도기에 머물러 있다.

당은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집권 세력의 취약점을 집중 공략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오끄라동 토지분쟁으로, 단순한 토지문제를 넘어 지역 권력과 정치권의 결탁 의혹으로 확대됐다. 특히 품짜이타이당의 핵심 기반인 부리람 주 칫첩 가문 소유 토지가 포함됐다는 주장이 제기돼 정치적 파장이 커졌다. 2024년 상원 선거 조작 의혹도 주요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수사당국은 조직적 표결 공모, 투표 조작, 불법 정치자금 사용을 조사 중이며 AI 분석으로 이상 투표 패턴이 확인됐다. 일부 현직 상원의원과 품짜이타이당 관계자의 연루 정황이 드러났고 아누틴 총리도 대표 시절 소환 통보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쁘라차촌당, 캐스팅보트에서 제1세력으로

2025년 정치지형 재편의 가장 큰 승자는 단연 쁘라차촌당이다. 총리 선출 과정에서 찬성표를 던졌지만 연정에는 참여하지 않으며 정치적 공간을 넓혔다. 이는 군부 및 보수세력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도 젊은 세대의 개혁 열망을 유지하려는 계산된 전략이었다.

품짜이타이당 집권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을 간파한 쁘라차촌당은 연정에 직접 들어가지 않고도 정책협상에서 주도권을 확보했다. 의회 내 캐스팅보트 역할을 통해 헌법개정, 조기총선, 개혁 어젠다 등 핵심 정책을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동시에 딜레마도 안고 있다. 개혁을 서두르면 보수·군부진영과 충돌해 정치기반이 흔들릴 수 있고 속도를 늦추면 핵심 지지층인 젊은 세대가 이탈할 우려가 있다. 특히 개헌 문제에서는 쁘라차촌당이 4개월 내 하원 해산과 국민투표를 통한 전면 개헌을 주장하지만 품짜이타이당은 제한적 개헌을 선호한다. 연정 의석수가 148석에 불과한 아누틴 총리 정부는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조정과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결국 개헌 범위와 속도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향후 정국의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왕실·군부·사법부 '보이지 않는 손' 변수

태국 정치의 불안정성은 단순한 정당 경쟁의 결과가 아니다. 정치 무대 뒤편에서 왕실·군부·사법부라는 전통 권력이 전략적으로 움직이며 정국을 조율하고 있고, 이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2026년 총선 판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왕실은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핵심변수다. 국왕의 장녀가 병석에 있는 가운데 미국에서 장기간 생활하던 왕자가 귀국하면서 왕위 계승 구도가 다시 요동칠 가능성이 제기된다. 왕실은 특정 정치세력과의 충돌을 피하면서도 체제 안정을 위한 절충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법부 역시 정치 경쟁의 주요 축이다. 2023년 총선 이후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프어타이당 소속 총리 두 명이 연이어 물러났으며 과거까지 포함하면 탁신계 정당이 두 차례 해산되고 다섯 명의 총리가 퇴진했다. 제1당 쁘라차촌당의 전신 정당도 두 차례 해산된 바 있다. 이처럼 사법판단이 반복적으로 정치 지형을 뒤흔들면서 법치주의 본래 기능을 넘어 권력 균형을 재편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를 약화시키는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군부의 영향력도 여전히 강하다. 최근 국경 충돌은 민족주의를 자극해 젊은 세대까지 ‘국가 안보’ 담론에 동참하게 만들었고 군부는 이를 활용해 ‘국가 수호자’ 이미지를 강화했다.

캄보디아가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와 국제사회의 개입을 검토하자 국내 여론은 ‘영토보전’과 ‘주권방어’를 핵심 의제로 결집했다. 외교·안보 이슈는 총선을 앞두고 핵심 정치 의제로 부상하며 보수 진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2026년 총선, 복합 권력 구조의 시험대

내년 총선은 3월 또는 4월 초 실시될 가능성이 높다. 이 총선은 정권교체를 넘어 태국 정치의 구조적 향방을 결정짓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현재 정치구도는 정당 경쟁, 전통 권력, 외교·안보 변수가 맞물린 복합구조로 이들의 상호작용이 선거 판세를 좌우할 것이다.

품짜이타이당은 집권 프리미엄을 갖고 있으나 독자적 정책 추진이 어렵다. 프어타이당은 탁신 정치의 상징성을 유지하며 세대교체와 정책 혁신을 동시에 추진해야 하지만, 탁신계의 영향력 탓에 완전한 ‘포스트 탁신’ 전환은 쉽지 않다. 쁘라차촌당은 연정에 참여하지 않고도 개헌과 조기 총선에서 주도권을 확보했지만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도 지지 기반의 위험이 존재한다.

왕실의 전략적 판단, 사법부의 판결, 군부의 안보 프레임 강화는 정치 무대 뒤편에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여기에 외교·안보 문제와 민족주의 여론이 더해져 이번 총선은 태국 정치질서 전체를 시험하는 무대가 된다. 선거 결과는 각 정당의 전략, 전통 권력의 움직임, 외부 변수의 충격이 복합적으로 맞물린 결과로 나타날 것이다.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