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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과 문명의 퇴보

2026-04-30 13:00:02 게재

중동전쟁이 답보 상태로 돌입하면서 잔혹한 파괴의 소용돌이는 어느 정도 잠잠해졌지만 군사적 충돌과 경제적 위기를 넘어 이번 전쟁은 인류가 쌓아온 문명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이 파괴하고 있는 대상은 한 나라나 특정 세력이 아니다. 전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이 갈등이나 충돌을 피하도록 오랜 기간 차근차근 만들어온 문명 자체를 부수고 있다.

문명의 가장 커다란 결실은 제도다. 어떤 제도든 완벽하지는 않지만 제도가 없는 상태보다는 훨씬 안정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전쟁과 관련 인류는 다양한 규칙과 제도를 만들었다. 선전포고는 가장 대표적인 제도적 장치 가운데 하나다. 2020년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국의 이란 침공은 똑같이 선전포고는커녕 갑작스레 전면적 침략을 ‘특수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거행한 사례다. 이는 전쟁을 선포할 경우 의회의 승인이 필요한 국내 정치 제도를 우회하기 위한 꼼수다.

국가 사이에 조약이나 합의를 통해 관계를 조절하는 양식도 인류 문명의 큰 진보였다. 원래 이란 핵과 관련 2015년 미국과 이란을 비롯해 러시아 중국 유럽 국가들도 동참하는 합의에 어렵게 도달했지만, 트럼프가 집권하면서 2018년 깨뜨려 버렸다. 강대국이 나서 특정 합의를 무시하는 행위도 문제지만 자국이 주도해서 서명한 합의를 파기하는 변덕은 심각한 전례를 남기는 것은 물론 신뢰를 파괴한다.

문명의 가장 소중한 기둥은 원칙

문명의 가장 소중한 기둥은 원칙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은 갈등이나 다툼이 있더라도 최소한의 공동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쟁 중에도 민간인이나 민간 시설에 대한 공격은 피한다는 원칙이 있다.

미국의 이란 침공은 초기부터 교육 시설 폭격으로 학생들을 살해한 것은 물론 트럼프 가 나서서 이란 문명을 초토화하겠다거나 모든 교량과 발전시설을 파괴하겠다며 협박하기도 했다. 특정 문명을 초토화한다는 발언은 인종학살을 상기하게 만드는 심각한 범죄 행위다. 발언만으로 범죄에 해당한다. 세계 최강의 최고 지도자가 나서서 범죄에 해당하는 막말을 쏟아내니 당연히 힘겹게 쌓아놓은 인류 공통의 도덕적 기준은 경시할 수 있는 거추장스러운 장치로 격하된다.

문명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예의다. 서로 전쟁을 하거나 갈등이 존재하더라도 예의는 대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이란에 대한 협박이 보편적 원칙을 부정하는 범죄행위에 해당한다면 미국의 전통적 동맹국들과 관계는 예의에서 벗어나는 자극적 언행으로 물들었다. 트럼프는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유럽 국가들이 동참하기를 거부하자 ‘배은망덕’이라고 비난했고, 유럽 지도자들은 사전에 논의하지도 않은 전쟁에 억지로 유럽을 끌어들이려는 미국이야말로 ‘적반하장’이라며 응수했다.

예의에서 벗어나는 행동이 반복되면 동맹은 물론 우호적 관계, 아니 관계 자체도 깨질 수밖에 없다. 특히 국가 간 외교관계에서 의전이 기본을 이루는 배경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란과 협상을 벌이는 도중에 전면적 습격을 감행했다. 또 미국이 동맹국 일본과 사전협의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일본 총리를 앞에 두고 일본이 진주만 공격할 때 사전협의를 했냐고 되물었다. 트럼프의 사전에 예의란 없는 듯하다. 백악관 오벌오피스는 이미 유럽 지도자들 사이에는 ‘고문(拷問)실’로 유명하다. 그곳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문명 무너질 때 위험해지는 당사자는 미국

제도를 만들고 원칙을 세운 뒤 예의를 갖춰 관계를 맺는 국제사회는 당연한 무대가 아니다. 인간들이 수도 없이 싸워가면서, 잔혹하게 피 흘리면서, 반성하고 고민해서 서서히 어렵사리 쌓아온 공든 탑이다. 불행히도 중동전쟁뿐 아니라 트럼프 2기의 전반적인 경향은 이런 공든 탑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방향이다.

문명 이전의 상태, 즉 홉스가 말했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그리고 국제관계라면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으로 추락하는 상황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란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중동전쟁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교훈, 그리고 트럼프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은 제도와 원칙과 예의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미국이었으며, 문명이 무너질 때 가장 위험해지는 당사자는 미국과 같은 ‘가진 자’라는 점이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