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정치판사’는 없다?
최근 사법부를 둘러싼 정치적 소란 와중에 한 법조인의 일생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다. 지난해 10월 16일 세상을 떠난 ‘제1세대 인권변호사’ 이세중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의 1주기를 맞아 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는 일을 하면서다. 온화한 성품과 중도적인 성향으로 여겼던 그의 삶에 우리 사법사의 굴곡과 거기에 치열하게 맞선 역정이 비중 있게 담겨 있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32년 전에 있었던 이른바 ‘제3차 사법파동’ 때의 얘기다.
사법파동이라고 하면 사법부 내부 또는 사법부와 행정부가 크게 충돌한 사건을 말한다. 우리 사법사에는 1971년, 1988년, 1993년, 2003년 등 총 네차례 그런 일이 있었다. 2009년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권 침해 사건과 2018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태를 각각 5,6차 사법파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치’가 원인을 제공해 벌어진 일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에 대한 여권의 사퇴 압박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뜨거운 화두인 ‘사법의 정치화’ ‘정치의 사법화’가 우리 헌정사를 얼룩지게 한 오랜 망령과 같은 존재임을 알 수 있다.
1993년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정권이 출범하며 사회 각 분야에서 개혁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대법원도 자체 개혁안을 마련하고 전국법원장회의에서 의견을 수렴하는 등 개혁 분위기에 편승했다. 하지만 법관 재산공개에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등 근본적인 개혁의지는 부족한 모습이었다. 이런 가운데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 40명이 사법부의 반성과 개혁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내면서 제3차 사법파동으로 비화했다.
일상이 된 ‘사법의 정치화’ ‘정치의 사법화’
당시 이세중 회장 체제의 대한변협은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사법개혁안을 제기했다. 바로 ‘정치판사’의 퇴진 요구였다. 사법부의 근본적인 개혁은 제도개편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인적개편이 수반돼야 한다는 게 변협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는 1세대 인권변호사로서 130여건의 인권변론을 맡았던 이 회장에게는 온몸으로 겪은 경험칙이었다. 함께 변론했던 고시 동기(한승헌 변호사)와 판사 사표 동기(강신옥 변호사)가 구속되는 바람에 그들을 변론하기도 한 그였다. 이 변호사는 변협 회장 당선소감을 통해서도 “유신 때 사법을 파행적으로 운영한 판검사들이 현직 고위간부로 아직까지 남아 재조 법조계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는 현실은 법조계를 위해 매우 걱정스러운 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판사는 군사정권 시절 권력에 영합해 무소신 또는 납득할 수 없는 재판을 했거나 시국사건의 재판을 조정 통제했던 인사를 뜻하며 대법원 개편 요구는 김덕주 대법원장 및 대법관 대부분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변협이 밝혔다. 대법원은 ‘사법권 독립 침해 행위’라며 발끈했다. 현재 사법부는 과거청산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정치판사는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치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정치판사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변협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법부 수뇌부가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시국사건 재판에서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 정치판사 20~30명의 명단 공개를 검토하겠다고 맞받아쳤다. 당시 언론에서는 1974년 민청학련사건, 1979년 김영삼총재직무정지가처분신청사건,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등 여러 사건이 정치 지향성 판결 사례로 언급됐다.
사법부 역할에 대한 본질적 고민 필요한 때
재조와 재야 법조계가 크게 대립한 3차 사법파동은 ‘사법의 정치화’를 배경으로 한 점에서 지금의 사법상황과 닮았다. 변협은 정치판사 명단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대신 김덕주 대법원장과 안우만 법원행정처장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다. 결국 김덕주 대법원장은 뒤이은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과 관련해 사법부 고위간부의 부동산 과다 보유 등 도덕성 문제가 제기된 데 대해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물러났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사법파동과 사법개혁이 있었지만 ‘정치판사’는 여전히 망령처럼 존재하고 있다. 정치판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뿐이라는 사법부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판결 시비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사법불신의 골이 너무 깊어졌다. 제도개혁은 효과 없고 인적개혁은 불가하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사법부의 존재감, 역할에 대한 본질적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