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몰락·이과 쏠림 넘어 융합 역량이 답이다
취업난에 자연계열 쏠림 심화 … AI 시대 인문학 기반 융합 사고력이 경쟁력
2018학년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이 적용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문과·이과 인문·자연의 경계가 살아 있다. 대부분의 학생은 ‘문송’ 하지 않기 위해 자연계열을 택하고 인문계열에 남은 학생은 대입과 취업이 걱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가들은 이분법적인 계열 구분을 뛰어넘어야 새로운 미래에 적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인문과 자연의 융복합이 필요한 시대 학생이 길러야 할 새로운 역량은 무엇일까? 인문 성향 학생의 진로를 넓혀줄 융합 전공과 선배의 사례도 함께 살펴본다. 전문가들은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비판적 사고력에 논리적 사고와 기술 이해를 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수도권 인문계열 학과의 정시 합격생 중 과반이 수능 ‘미적분’ 또는 ‘기하’ 응시자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자연계열 학생의 교차지원을 의미하는 문과 침공이 다시 화두에 올랐다. 문과 침공이 늘면서 인문계열 학생들은 설 자리가 줄었는데 자연계열 학생 역시 대학 진학 후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상황의 배경에는 중·고등학생 대부분이 자연계열 전공을 희망하는 이과 쏠림이 있다. 최근에는 고교 입학 직후에 자연계열로 진로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고3이 된 후 선호도 높은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 인문계열 전공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문과 침공이 발생한다.
◆좁아진 취업문 통과 위한 이과 쏠림 심화 = 이과 쏠림이 심화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시험 유형에 따라 출제 범위와 문제 난도가 달랐던 2015·2016 수능에서는 인문계열 학생은 국어 B형·수학 A형·사회탐구를 자연계열 학생은 국어 A형·수학 B형·과학탐구를 주로 선택했다.
처음 문·이과계열 구분이 없어진 2022학년에도 인문계열 학생이 주로 선택하는 ‘확률과 통계’의 응시자 비율이 51.6%로 ‘미적분’ 또는 ‘기하’의 선택 비율과 비슷했다. 자연계열 학생의 증가가 두드러진 것은 2024학년이다. ‘확률과 통계’ 응시자는 1만4000여명 줄어든 데 반해 ‘미적분’/‘기하’ 응시자는 1만2000여명 증가하면서 총 55%를 차지했다.
또한 서울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에서 2025학년 수시를 분석한 결과 교과 성적이 1~1.5등급인 학생 중 83.2%가 ‘미적분’ 혹은 ‘기하’ 과탐 2과목을 응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위권 학생들 사이에서 자연계열에 대한 선호가 뚜렷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학교 현장에서도 자연계열 선호 현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오창욱 광주 대동고교사는 “전에는 9개 학급 중 자연계열 반이 5개 인문계열 반이 4개였다면 요즘은 8개 학급 중 6개 2개”라며 “상위권 학생은 20명 중 1~2명 정도가 인문계열 전공을 희망하거나 그마저도 없는 정도”라고 자연계열 쏠림의 현실을 짚었다.
정제원 서울 숭의여고교사 역시 “여학생은 인문 분야 진로를 희망하는 경우가 많아 과거에는 10개 학급 중 8개가 인문계열 반이었다”라며 “최근에는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5대5로 비율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허철 진학사 입시전략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최근에는 수학·과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인문계열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라며 “사회 과목에 특별한 열정을 가지지 않는 이상 무조건 자연계열을 선택하는 편이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과 쏠림의 가장 큰 요인은 취업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몇 년간 이어진 의대 열풍과 인공지능(AI)의 비약적인 발전도 영향을 미쳐 전문적이고 AI에 대체되지 않을 전공에 대한 선호가 높아졌다.
오 교사는 “문송하다라는 말이 등장한 이후 취업을 위해서는 이공계 분야로 진출하거나 전문적인 직종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발표한 2023년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취업 통계에 따르면 의약계열(82.1%)과 공학계열(71.9%)의 취업률은 평균 취업률(70.3%)보다 높았고 나머지 계열은 평균 이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학생들의 자연계열 선호는 불가피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AI와 인간의 가치 잇는 융복합 역량 길러야 = 문제는 정말 언어·사회에 흥미가 있거나 수학·과학에 자신이 없어 인문 계열에 남은 학생이다. 미래에는 정말 인문학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이런 시대일수록 한 영역에만 갇히지 않고 인문과 과학을 잇는 융합의 관점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몇달 전 배운 지식도 뒤처지는 상황에서는 인문학을 기반으로 한 비판적인 사고력이 빛을 발한다는 이야기다. 다만 논리적 사고와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함께 갖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재영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교수(전 인문대학 학장)는 “이제 하나의 전공만으로는 세상을 설명하기 어렵다”라며 “기술이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시대일수록 필요한 것은 기술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비판적으로 보는 힘”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때 윤리와 책임 사람에 대한 이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라며 “인문학은 기술이 인간을 위한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기준을 세우는 데 쓰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술이 나아갈 기준을 세울 때는 생각을 논리적으로 이어가는 힘이 필요하다. 전문가는 복잡한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사고의 구조를 세우는 훈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권오성 아주대학교 경영인텔리전스학과교수는 “AI 시대의 핵심 역량은 논리적 사고력”이라며 “명령이 순서대로 작동하는 코딩처럼 생각에도 논리적 흐름이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인문 성향 학생들도 A에서 B로 B에서 C로 이어가는 구조적 사고를 쌓을 수 있도록 훈련하기를 권한다”고 조언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인문 성향 학생이라도 수학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수학은 논리적 사고를 기르고 AI를 이해하기 위한 기반일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학생의 선호도가 높은 상경계열에서 수학 역량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오 교사는 “고등학생에게 수학은 사고력을 기르는 가장 중요한 과목”이라며 “특히 경영학과나 경제학과를 희망하는 학생은 수학 역량이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상경계열 권장 과목으로 ‘미적분’을 제시한 주요 대학도 있다. 이를 인지하지 못한 채 고3이 되면 선택의 폭이 좁아 아쉬움이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최근 AI가 생활과 산업 전반에 확산된 만큼 인문 성향 학생들 역시 AI의 작동 원리와 데이터·알고리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좋다.
권 교수는 “우리 학과처럼 경영과 IT가 결합된 융합 전공의 경우 모든 학생이 프로그래머가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며 “중요한 건 AI를 이해하고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용자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생성형 AI의 발전으로 자연어로 AI를 제어하고 결과를 조정하는 기술이 확산되면서 언어 감수성과 논리적 사고를 함께 지닌 인문 계열 학생들이 주목받고 있다. 실제 대학에서도 인문 계열 학생들이 AI 윤리 데이터 해석 디지털 리터러시 등 융합 교과를 배우며 AI 분야로의 진출을 모색하는 추세다.
◆계열 넘나드는 대학별 융합학과 주목 = 교육 현장에서도 융합형 인재를 키우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교육부는 인문사회와 인공지능을 함께 배우는 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300억원 규모의 인문사회 융합인재 양성사업을 추진 중이다. 기술 중심으로 쏠린 교육 흐름 속에서 사고력과 윤리의식 사회적 통찰을 함께 기르는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뜻이다. 광운대 공주대 부산대 서강대 홍익대 등은 AI와 인문사회 분야를 잇는 융합 교과 과정과 인턴십 등 실무형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이미 대학에서 운영 중인 융합학과를 탐색해봐도 좋다. 정부의 적극적인 장려가 시작된 이래 융합학과는 2023년 557개까지 늘어났다. 주로 공학계열 학과이지만 경영학이나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융합학과도 적지 않다.
아주대 경영인텔리전스학과는 경영학과 정보통신기술을 융합한 대표적인 사례다.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지는 경영 활동에 이전의 경영학 이론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보고 두 분야의 기본 이론뿐만 아니라 데이터 분석까지 폭넓게 다룬다. 분류상 인문계열 경영대학에 속하지만 졸업 후 데이터 분석가로서 역량을 기르고 IT 기업으로 진출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기존의 인문계열 전공을 확대한 융합학과도 눈에 띈다.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는 디지털미디어학부에 정보통신과 디자인을 결합해 모바일앱 제작 UX·UI 디자인 등 기술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제작을 배울 수 있다. 졸업 후 진로 역시 콘텐츠 기획자 게임·소프트웨어 개발자 프로그램 디자이너 등 다양하다.
가천대는 인문학과 정보기술을 융합한 디지털 인문학에 주목해 인문대학을 AI인문대학으로 변경하고 2025학년부터 전공 교육과정의 1/3을 AI 및 융합 교과로 편성했다. 파이썬 등 프로그래밍 언어 수업은 물론 포스트휴먼과 디지털서사창작 중국의 AI산업 및 문화산업 등 새로 개발한 융합 교과를 운영할 예정이다.
한국외대는 2024학년 AI 관련 융합학부를 다수 신설했다. 이 중 사회과학을 접목시킨 Social Science&AI융합학부와 금융을 다루는 Finance&AI융합학부를 인문 계열로 분류했으며 실제로도 인문 계열 학생의 합격 사례가 여럿이다.
◆언어와 문화 데이터를 연결해 진로를 넓혀 = 조우진 아주대 경영인텔리전스학과 3학년(대전외고) 학생은 고교 시절 인문계열 진로를 선택했다.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특히 해외 진출에 관심을 가지면서 언어와 문화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조 학생은 “저희 학과는 경영학과 소프트웨어가 결합한 융합 전공으로 산업공학의 인문계열 버전 같다”라며 “전공 수업의 절반 이상이 데이터를 다루거나 AI 원리를 배우는 과목”이라고 설명했다. 조 학생은 앞으로 해외 진출이 꿈이라 마케팅이나 인사 같은 일반 경영 직무보다 문화나 언어 중심의 넓은 시야로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 학생은 인문계열 진학을 고민하는 고등학생 후배들에게 “솔직히 수학이 어려워 인문계열을 선택했다”며 “지금 선택에 후회는 없지만 만약 수학을 피하지 않았다면 더 넓은 선택지를 가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기수·박선영 내일교육리포터·송지연기자 hena20@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