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스니커가 그리는 새 산업 지도

2025-10-29 13:00:03 게재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세계의 공장으로서 운동화공급을 석권했던 중국이 베트남에 그 자리를 내놓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 운동화가 지난 몇년 사이 중국을 떠나 베트남의 호치밍시티로 공장을 대거 옮겼다고 전했다. 이유는 중국의 임금상승, 미국의 공급망재편 정책, 베트남의 산업유치 전략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운동화는 영어로 ‘스니커(sneaker)’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대부분 젊은이들은 이 말을 스스럼없이 쓴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고무창과 캔버스를 결합한 신발을 신고 걸으면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아 ‘몰래 움직이다’라는 뜻의 스니크(sneak)에서 파생된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젊은이들의 청바지 문화와 결합하며 운동화는 자유와 반항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다.

마를린 먼로, 제임스 딘 같은 유명 배우들이 스니커를 신는 순간 이 신발은 단순한 생활용품을 넘어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이후 나이키 아디다스 컨버스 같은 브랜드가 디자인과 마케팅으로 시장을 장악하면서 운동화는 경제와 문화가 만나는 산업의 얼굴이 되었고, 실리콘밸리는 스티브 잡스 등 스니커를 착용한 CEO들의 무대가 되었다.

중국 떠나 베트남으로 옮겨간 운동화산업

개인적인 경험담을 하나 소개하면 1986년 미국 동부 뉴햄프셔 주 맨체스터로 취재를 간 적이 있다. 이 도시는 이름이 암시하듯 영국 맨체스터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세운 곳으로, 면직물 공업이 발달하며 한때는 청바지와 운동화를 생산하던 경공업의 거점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찾아갔을 때 공장들은 텅빈 채 유리창엔 거미줄이 얽혀 있는 몹씨 침체된 도시였다. 상공회의소 담당자에게 사정을 물었더니 노동집약적인 면제품과 운동화 산업이 노동력이 헐한 미국 남부 조지아주나 한국으로 떠났다는 설명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오레곤 포트랜드에 있는 나이키 본사를 방문했을 때 나이키 고위간부에게 “운동화를 만드는 공장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우리는 공장이 없다. 여기서는 디자인만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공장은 어디 있느냐고 묻자 “부산에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기업들은 제조업을 뒤로하고 브랜드 기획 마케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바꾸고 있었다. 운동화 소비문화와 유행의 중심은 여전히 미국이었지만 실제 생산은 아시아로 넘어간 상태였다.

운동화 공장의 국경 이동 경로는 곧 세계 산업 이동사의 압축판 같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한국에서 중국으로, 그리고 지금은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옮겨가는 과정이 그렇다. 어느 나라가 다음 생산기지가 되느냐는 질문은 결국 “누가 더 싸게, 더 빨리 만들 수 있는가”의 문제다. 운동화 공장이 움직이는 방향은 임금수준의 변화, 자본과 노동의 관계, 무역환경, 정치적 리스크를 그대로 반영한다.

세계 제조 허브 역할을 하던 중국은 지난 10년간 임금상승이 가속화했으며, 미국이 중국 견제 차원에서 공급망 재편 정책을 펴왔고 트럼프2기 들어 대중국 고율관세를 부과하면서 중국의 입지가 약화됐다.

베트남은 젊은 노동력과 낮은 임금을 앞세워 중국의 빈자리를 급속히 메우고 있다. 나이키 아디다스 푸마 같은 기업의 주문자상표부작생산(OEM) 공장이 몰리고 있고, 수출 비중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산업 이동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임금이 오르고 사회가 중산층화되면 공장은 또 다른 저임금 지역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운동화가 어디서 만들어지느냐’가 아니다. 언젠가 운동화가 떠난 뒤 그 자리에 무엇을 세울 것인가다. 부산은 1980~1990년대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빠져나가자 항만·물류·디자인·영상산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신발산업은 ‘한국신발산업진흥센터’를 중심으로 고기능성 스포츠화, 의료용 신발 등 기술집약형으로 전환했다.

중국 광둥성은 더 영리했다. 저임금 이점이 사라지자 내수 중심의 브랜드를 키우고 전자·패션·스마트 제조로 산업구조를 빠르게 업그레이드했다. 중국의 운동화 공장은 여전히 내수시장의 거대한 수요 덕분에 가동을 멈추지 않는다.

공장 대신할 새산업 유치가 도시운명 바꿔

필자가 방문했던 맨체스터시는 경공업 산업이 공장 문을 닫으며 침체에 빠졌을 때 대학과 디자인 산업에 투자해 ‘지식도시’로 탈바꿈했다. 지금의 맨체스터는 음악·문화·스포츠로 브랜드를 세운 대표적 재생 도시다. 누가 그 변화를 만들었는가. 공장을 다시 불러들이려 애쓴 정치인이 아니라‘공장을 대신할 새 산업'을 끌어들인 대학 병원 기술기업의 혁신가들이었다. 미국 산업이 운동화를 버린 순간 맨체스터는 운동화가 아닌 두뇌를 유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의 이동이 곧 도시의 쇠퇴를 뜻하지는 않는다. 남은 자리를 어떻게 채우느냐가 도시의 운명을 바꾼다. 스니커는 소리 없이 세계를 돌아다니는 신발이지만, 그 발자국은 늘 정확하게 시대의 흐름과 방향을 보여주는 산업지도다.

언론인 전 한국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