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APEC 참석 마무리, 다자주의 기치로 중국 영향력 과시
트럼프 불참 속 WTO 중심 체제 강조 … 내년 선전 개최 확정
미 일방주의 겨냥 아태공동체 구축 제안 … 캐나다·일본과도 회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일 2박3일간의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했다. 시 주석은 이번 APEC 참석을 통해 다자무역 체제 수호와 아태 공동체 구축을 강조하며 지역 내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중 정상회담서 관세전쟁 봉합 의지 재확인 = 시 주석은 30일 김해공항 공군기지 내 접견장인 나래마루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과의 관세 전쟁 봉합 의지를 재확인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상호 보복의 악순환에 빠져서는 안 된다”며 “경제무역 문제 해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장기적 이익이라는 큰 계산을 해야한다”며 “평등 존중 호혜의 원칙에 따라 계속 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에 공개된 모두발언에서는 “중국의 발전과 부흥은 트럼프 대통령이 추구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목표와 상충하지 않는다”며 “중국과 미국은 파트너이자 친구가 돼야 한다”는 유화적 메시지를 발신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양국 정상은 이날 회담에서 경제 및 무역 에너지 등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인문 교류를 촉진하기로 합의했다. 미중 정상이 정기적인 교류를 유지하는 데 동의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초 중국을 방문하고 시 주석을 미국에 초청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중 정상회담서 FTA 2단계 협상 가속화 합의 = 1일 오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은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2단계 협상을 가속화하고 인공지능(AI), 바이오제약, 녹색산업 등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전략적 소통으로 상호 신뢰의 기반을 강화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중한 관계를 바라보기를 원한다”며 “상호 존중 속에서 공동 발전하며 협력하고 상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회담 직후 경주 소노캄 호텔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서 “저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님은 흔들림 없이 평화를 위한 길을 함께 나아가기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공동 번영의 기본적 토대는 바로 평화”라며 “양국이 어떤 상황에도 평화를 지향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 정부가 평화 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는 과정에서 중국 역시 건설적인 역할을 맡아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양국 정부가 체결한 양해각서(MOU) 내용을 소개하며 “양국은 스캠 등 초국가 범죄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약속했다”며 “실버산업과 문화산업 등 미래를 위한 혁신에 힘을 모을 것”이라고 전했다.
◆트럼프 불참 속 다자주의 강조 = 시 주석은 31일 APEC 정상회의 본회의에서 “세계무역기구(WTO)를 핵심으로 하는 다자주의 무역 시스템의 권위와 유효성을 제고하자”며 “진정한 다자주의를 이행하자”고 제안했다. 이번 연설은 트럼프 대통령이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 특별연설 후 본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은 채 출국한 가운데 이뤄졌다.
시 주석은 “100년 만의 세계적 변화가 빨라지고 국제정세가 복잡해지고 있다”며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을수록 한배를 타고 함께 강을 건너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APEC이 1993년 제1차 정상회의에서 제시한 아태공동체 형성 비전을 다시 꺼내며 “보편적 특혜가 주어지고 포용적 경제 세계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개방형 지역경제 환경을 함께 만들자”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고품질 실시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회원 확대를 통해 아시아태평양 자유무역지대(FTAAP) 건설에 힘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APEC CEO 서밋의 서면연설에서도 시 주석은 중국이 진정한 다자주의 실행자이자 국제 질서의 옹호자라며 “일방주의는 분열과 퇴보만 가져올 뿐이고 다자주의는 글로벌 도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밝혔다. “중국과 함께 걷는 것은 기회와 함께 걷는 것”이라며 참석자들에게 중국 투자를 권유했다.
1일 APEC 정상회의 폐막일 두 번째 세션에서는 AI 분야 협력을 강조하며 “중국은 세계 AI 협력 조직 설립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날 시 주석은 다음 APEC 정상회의가 내년 11월 중국 광둥성 선전에서 열릴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선전은 낙후된 작은 어촌에서 세계적 대도시로 발전한 사례로 시 주석은 “APEC은 아태 지역의 가장 중요한 경제협력 메커니즘”이라며 “아태 공동체 구축은 아태 지역의 장기적 발전과 번영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신화통신은 회원국 정상들이 내년 중국의 APEC 정상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했다고 전했다.
◆캐나다·일본과도 양자회담 = 시 주석은 APEC 기간 캐나다 일본과도 양자 회담을 가졌다. 31일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와의 회담에서는 “최근 양측의 공동 노력으로 중국 캐나다 관계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며 “중국은 양국 관계를 올바른 궤도로 돌려놓기 위해 캐나다와 협력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카니 총리에게 중국을 방문해달라고 초청했고 카니 총리는 이를 수락하며 “건설적이고 실용적인 대화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이번 공식 정상회담은 쥐스탱 트뤼도 총리 시절인 2017년 이후 처음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서는 “나는 당신과 소통을 유지하고 중일 관계가 올바른 궤도로 전진 발전하도록 함께 추동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시 주석은 “중국은 일본과 4대 정치문건이 확립한 원칙과 방향에 따라 양자 관계의 정치적 기초를 함께 수호하고 중일 전략적 호혜 관계를 추진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4대 정치문건은 1972년 수교 때 발표한 중일 공동성명 1978년 중일 평화우호조약 1998년 중일 평화와 발전의 우호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노력을 위한 공동선언 2008년 중일 전략적 호혜관계 전면 추진에 관한 공동성명을 가리킨다.
◆더 강해진 중국 과시 = 시 주석의 이번 APEC 참석은 미국이 일방적 관세정책을 밀어붙이며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고 다자기구에서도 발을 빼는 상황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트럼프 행정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강조하는 가운데 정작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력 다자기구인 APEC 본회의에서는 미국을 일방주의로 비판해온 시 주석이 다자주의를 강조한 것이다.
서방 외신과 전문가들은 중국이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트럼프 1기 무역전쟁 때보다 더 강력해진 면모를 각인시켰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의 첫 임기 이후 중국이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를 분명히 했다”며 “광범위한 싸움에서 중국은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중국 전문가 스콧 케네디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일부 양보를 했지만 분명한 역학관계는 중국의 위협이 미국을 움직여 일련의 제한 조치를 철회하게 했다는 것”이라며 “시 주석은 중국의 경제시스템과 글로벌 리더십 확대 노력 측면에서 더 안전한 공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해방의 날 관세를 발표한 이후 중국이 보복관세와 희토류 수출통제 등 일련의 대응카드로 “최소한 세 차례 이상 미국의 징벌적 조치 실행을 막고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게 했다”며 “이번 정상회담은 미국과 동등한 국가로서 중국의 자신감이 커지고 있음을 강조한다”고 지적했다.
FT는 “거의 10년 전 트럼프의 첫번째 무역 공세가 중국을 놀라게 했으나 이번에는 더 잘 준비되고 경제적으로 더 강력해진 중국이 한때 자신보다 훨씬 강했던 적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중국 관영매체들도 미중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평을 잇따라 내놨다. 인민일보는 “중미 양국 정상의 부산 회담은 중미 간의 공동이익이 이견보다 훨씬 크고 협력은 양국의 유일하게 올바른 선택이라는 점을 다시 증명했다”고 주장했다. 신화통신은 시 주석의 발언을 소개하며 “이 발언은 솔직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미국과 전 세계를 향해 중국이 평화발전 협력윈윈의 굳은 결심을 분명히 전달했다”고 자평했다.
시 주석은 이날 오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중정상회담에 이어 소노캄 경주에서 개최된 국빈만찬이 끝난 뒤 오후 7시 33분께 의전차량인 훙치를 타고 떠났다. 김해국제공항으로 이동해 곧바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