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견 칼럼
‘한국 치켜세우기’ 젠슨 황만 한 게 아니다
정부가 내년도 예산을 올해보다 8.1%나 증액한 728조원으로 편성했다. 매머드급이다. 기획재정부의 ‘2025~2029년 국가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내년 이후 2029년까지 증가율이 매년 4~5%를 기록, 2029년 재정지출은 834조7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내년에도 1%대 저성장이 예상되고 6.3 지방선거까지 기다리고 있어 한두차례 경기부양 추경 편성이 확실시 된다.
특히 미국과의 관세협상에 따른 3500억달러 대미투자와 방위비 증액, 미국무기 구입 등이 예상되는 만큼 재정적자는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3500억달러 대미투자는 정부 보증 형태의 기금이 근간이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석유화학 철강 등 경쟁력 약화 업종에 대한 대대적 구조조정도 예고돼 있어, 공적자금 투입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간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엄청난 대북지원 지출도 대기중이다. 외교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4월 중국을 방문할 때 북미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북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해빙이 도래할 경우 트럼프 성격상 미국이 대북투자 비용을 댈 가능성은 제로(0)다. 청구서는 우리 몫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긴장 해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투자이나 결실을 얻기까지엔 장기간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다가 이재명 대통령이 누차 경고한 부동산거품 파열까지 발발한다면 재정적 타격은 예측불허다.
재정건전성 빠른 속도로 악화
이같은 잠재적 예산 수요들을 제외하더라도 기재부 추산에 따르면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도 올해 49.1%에서 내년 51.6%로 50%를 넘어선 뒤 2029년 58.0%까지 급상승한다. 국가채무 비율이 60% 부근까지 올라선다면 국가신용등급에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80%가 되면 유럽이 경험했던 재정위기 수준이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은 우리나라보다 국가채무 비율이 크게 높으나 이들은 기축통화 또는 준기축통화국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재정건전성이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악화되고 있다.
한미 관세협상만 타결되면 뚝 떨어질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원달러 환율이 다시 고공행진중이다. 4일에는 장중 1440원을 돌파하기도 했다. 돈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은 우리 경제 펀더멘털, 즉 기업 경쟁력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의미다. 외국인의 국내주식 투자만 봐도 ‘반도체 편식’이 두드러진다. 현재 반도체만 글로벌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위안은 현재의 교착 상태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해 “미국은 소프트웨어에 강점이 있지만 제조업이 약하고 유럽은 반대로 제조업이 강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약한데 한국은 두 역량을 두루 갖췄다”며 “한국이 AI 분야 리더가 될 가능성은 무한대”라고 말했다.
이는 15년 만에 방한한 젠슨 황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많은 해외 전문가들이 동일한 평가를 한다. “한국만큼 제조업 IT 인재 인프라 컬처 등을 골고루 갖춘 나라는 없다”고 한다. 특히 K-컬처가 글로벌 빅히트를 하면서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 과거에도 주류시장인 미국의 관심을 모은 다양한 외국 문화들이 있었으나 ‘일시적’이었다.
특히 K-컬처는 음악 영화 드라마 등 문화 부분을 넘어서 음식 화장품 의류 미용 등 전방위로 확산중이다. 텃새와 자부심이 강한 미국 주류 문화 시장을 파고들어 당당히 자리잡은 ‘유일한 컬처’라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최근 우리 극장가를 ‘귀멸의 칼날’ ‘체어맨’ 등 일본 에니메이션이 휩쓸고 있다. 요식업계에선 오마카세 열풍이 거세다. 하지만 이를 놓고 ‘일본문화 침입’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사라졌다. 일본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Z세대에선 “일본은 우리의 문화 식민지”라는 얘기까지 한다. 자신감 있게 상대방의 문화를 소비하고, 우리 문화를 당당히 소개한다. 일제 강점기가 뿌리깊게 남긴 적대감이나 콤플렉스에서 해방된 세대다.
제조업과 소프트웨어 모두 강해야 산다
우리는 제조업과 소프트웨어 모두가 강해야 산다. 하지만 제조업은 ‘중국 굴기’ 앞에 고전중이다. 잘 나가는 소프트웨어도 방심했다가는 거센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제조업을 일군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해봤어?”라고 평소 직원들에게 물었다. 예지력으로 유명한 성철스님은 생전에 “우리나라 앞길은 험난하나 밝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라”고 했다. 거인들이 우리 시대에 남긴 화두다.
이들 거인의 말을 믿고 진격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허탈한 ‘희망 고문’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단단히 신발끈을 조여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