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미국의 변화와 한반도의 선택, 유라시아에서 답을 찾다

2025-11-07 13:00:03 게재

2025년 11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미국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그런데 미국이 보여준 무관심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최근 미국은 그동안 추구해온 세계질서에 대한 입장을 바꾸고 있고 세계는 이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1980년대 말 새로운 자유무역질서를 구축하고자 하는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북미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진전과 유럽연합(EU) 통합의 가속화는 경제블록의 출현을 예고했다. 위기감을 느낀 아시아가 대응하는 협력체 구상을 모색하자 태평양 연안국인 미국은 논의되는 경제협력체에서 자국이 배제되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1989년 미국을 포함하는 북미 동북아 오세아니아 동남아 12개국에 의해 태평양 양안을 아우르는 APEC이 발족되었다. 한국도 발족 멤버다.

APEC이 출범한 지 36년이 지났다. 과거와 달리 미국정부는 덤덤하다. 여타 다자협력체 참여에도 소극적이다. 2017년 발족시킨 쿼드(QUAD)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의 주도적 역할에도 시큰둥하다. 이러한 일련의 행보에서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가 감지된다.

지난 5월 영국 항공모함의 인도·태평양 파견 시도를 보류시키면서 유럽에 대한 집중을 요구했다는 사실에서 미국의 생각이 읽힌다. 지역별 세력균형을 조성하고 미국이 각각의 균형을 통제함으로써 최소 비용으로 최대 영향력을 유지하는 세계전략을 모색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NATO의 동진이 얽혀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는 힘을 소진하고 유럽은 부담을 증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과도한 행동으로 커져버린 가자 전쟁은 이란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중동의 역학관계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한반도와 더불어 대만해협의 긴장은 일본의 역할을 강화시키고 한국의 기여를 요구한다. 서로 얽혀 세계질서가 변하고 있다. 지역별 세력균형 재편의 정점에는 직접관여를 최소화하고 저비용 고효율을 추구하는 미국이 보인다.

대륙과 해양 사이 완충지대 된 한반도

세계질서 재편 과정에서 한반도 지정학도 변화를 시작했다. 동북아에서 한반도의 역할 그리고 분단된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한반도 밖에서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면 어떨까.

한반도는 중원의 승자가 정해지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운명이 있었다. 동북아는 만리장성 이남과 이북 간 경쟁 구도이고 만리장성 이남에 대한 위협은 이북에서 시작되었다. 위협의 근원을 제거하고자 한나라는 고조선을, 중국대륙을 다시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후 북방세력인 원나라와 청나라는 중원 정복에 앞서 고려와 조선을 침공했다. 배후로부터의 공격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중원을 정복한 원나라는 한반도를 통해 왜를 침공했다. 대륙과 해양 사이의 가교로서 의미가 등장했다. 해양의 시대에 유럽과 교류하던 왜가 조선을 침략했다. 해양으로부터 대륙을 향한 위협이 한반도를 통해 시작되었다.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 일본은 러일 전쟁 승리로 대륙침략 시도를 본격화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소련과 미국에 의해 분할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국제전이 되었다. 대륙과 해양이 한반도에서 서로 부딪히고 있다.

한반도는 오래전 떠나온 북방을 잊어버리고 현재는 양분되어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은 순망치한의 북한을 후원하고 30여 년간 멀어져 있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북한에게 돌아왔다. 북한은 핵을 개발하고 더 이상 미국의 관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미국의 한미동맹에 대한 생각은 변하고 일본의 역할 증대는 예정된 수순이다. 한국은 일본과의 협력 강화 등 주변국 관계를 재정립하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한반도의 모습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운명과 살짝 겹쳐진다. 유라시아 내륙에 갇히고 러시아와 중국에 둘러싸인 이들의 행보는 한반도 지정학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유라시아 투르크계는 하나의 민족이다. 활동공간의 동쪽 절반은 중국의 영토가 되었고 서쪽 절반은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5개 국가로 독립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은 엄청나지만 항상 유동적이다. 5개국은 이를 인정하고 활용하고 균형을 잡으려 한다.

안보에 취약한 투르크메니스탄은 유엔으로부터 영세중립국 지위를 인정받고 중앙아시아 분쟁예방센터를 유치했다.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은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미국의 군사기지를 허용했다. 카자흐스탄은 러시아 주도 군사협력에 참여하면서도 우크라이나 침공은 지지하지 않는다.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와 이스라엘의 후원 하에 러시아가 지원하던 아르메니아에 대한 영토분쟁을 해결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배워야 할 생존전략

한편 투르크계 5개국은 러시아와 중국이 주도하는 지역기구에 참여하면서도 미국 EU 튀르키예 인도 일본 한국 등과 별도의 정상 및 각료급 협의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대한 최대 투자자는 EU다.

한반도도 이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미중대립의 완충지대로 머물 것인가, 아니면 중앙아시아처럼 다층적 외교 네트워크를 통해 독자적 생존 공간을 확보할 것인가. 중앙아시아 5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현명하게 운신하듯 한국도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중국 러시아 일본 동남아시아 유럽 등과 새로운 협력 패러다임을 모색해야 한다.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라는 지정학적 잠재력을 고려해 이제는 유라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전략적 연결고리가 되어야 할 때다.

정태인 전 투르크메니스탄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