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유럽 톺아보기
전쟁과 제재, 러시아 자금 1930억유로의 향방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유럽의 입장은 한결같았다. 국제법에 비춰 주권국가 우크라이나 영토에 대한 러시아의 총체적 침략은 불법적인 행동이며 국제사회에서 평화의 규범과 원칙을 추구하는 유럽연합(EU)은 대륙에서 이런 행동을 방관할 수 없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유럽은 우크라이나의 편에 서서 400만명에 달하는 전쟁 피난민을 대거 수용하고 경제적 지원을 결정하는 한편, 러시아에 대해서는 다양한 제재를 펴왔다. 대표적인 조치로 러시아 경제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등 자원 수입을 대폭 줄였다. 전쟁이 4년째 접어든 가운데 지난 9월 EU는 러시아에 대해 제19차 제재 조치를 발표한 바 있다.
러 자금 이용한 우크라 지원 목소리 커져
최근 들어 유럽은 더 강경하고 극단적인 수단을 강구하는 중이다. 러시아는 전쟁을 시작할 당시 유럽 벨기에에 있는 유로클리어(Euroclear)라는 금융기관에 1930억유로의 자금을 유치해 두고 있었다. 유럽은 침략국 제재의 한 부분으로 러시아 자금을 동결했다.
전쟁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유럽의 우크라이나 지원의 경제적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에 대해 훨씬 우호적인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출범하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대폭 축소됐다. 트럼프는 유럽측에 더 많은 경제적 부담과 책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유럽에서는 점차 유로클리어에 맡겨 둔 러시아의 자금을 이용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러시아가 불법적 침략전쟁을 시작한 책임이 있는 만큼, 러시아의 자금을 활용해 피해국을 돕는 일은 윤리적으로 합당하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1930억유로란 거대한 규모의 자금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경우 이는 전쟁의 방향을 뒤바꿀 수 있는 잠재적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윤리적으로 합당하고 전략적으로 효율적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러시아 자금을 유럽이 몰수하는 일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반대논리도 만만치 않다. 역사적으로도 이런 사례는 찾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제2차세계대전 중에도 적국의 자산을 동결하기는 했으나 몰수해서 활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산을 동결하고 있는 금융기관 유로클리어나 관할 국가인 벨기에는 특히 강력하게 반대하거나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다.
우선 유럽이 러시아의 자산을 몰수한다면 전쟁이 끝난 다음 심각한 법적 책임에 노출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유로클리어가 관리하는 1930억유로의 대부분은 정확하게 따지면 러시아 중앙은행 소유다. 러시아와 같은 독재국가에서 중앙은행도 정부의 일부로 침략전쟁에 동원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시각은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판단이지 법적인 논지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종전 후 심각한 법적 소송 휘말릴 우려도
유로클리어와 벨기에정부가 우려하는 바는 EU가 단순히 자금만 몰수하고 사후의 법적 책임은 지지 않는 상황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재산의 회수를 요청하는 소송을 제기하면 유로클리어와 벨기에정부가 이를 책임져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로클리어 총재는 유럽이 러시아 자금의 몰수를 결정할 경우 이를 중단시키기 위해 EU를 상대로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다.
논리적으로도 러시아가 불법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행동을 비판하면서 유럽 자신은 다른 나라의 자산을 불법적으로 몰수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논리로 대응하는 방식은 공정해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적의 불법적 수준으로 자신이 퇴보함을 의미한다.
다음은 유로클리어, 벨기에, 그리고 유럽이 전반적으로 ‘명성의 리스크’를 떠안게 된다는 사실이다. 정치적 필요와 판단에 따라 유럽에 맡긴 자금을 마음대로 몰수하거나 활용한다면 누가 유럽을 믿고 돈을 맡기겠냐는 문제다.
러시아는 실제 3000억유로 규모의 자금이 국제적으로 동결된 상황이고 그 가운데 2000억유로 정도가 유럽에, 나머지가 미국과 영국 일본 스위스에 있다. 유럽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러시아 자금의 활용이나 몰수를 고려하지는 않고 있다.
유로클리어만 보더라도 이 금융기관이 관리하는 자금은 42조5000억유로 수준으로 러시아 자금은 0.5%에 불과하다. 러시아 자금을 잘못 관리했다가는 나머지 99% 이상의 자금이 빠져나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금융에서 신뢰는 가장 핵심이며 소유권에 대한 보장은 신뢰의 뿌리다.
유로클리어와 벨기에가 유럽 전체를 포괄하는 금융 자산 관리의 독보적 행위자로 부상한 이유도 벨기에의 소유권에 관한 법이 가장 치밀하고 소유권 보호가 제일 탄탄하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중세에 이미 세계 최초로 도시마다 공공부채를 발행해 사업을 벌이고 매년 이자를 지급하는 창조적 금융의 첨단을 달렸던 지역이다. 연금(Annuity)이라는 표현은 매년 지급하는 정부 부채 이자를 지칭하는 중세 단어에서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노후소득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1000년에 달하는 금융 중심의 명성을 유럽연합의 시대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벨기에의 의지를 꺾기는 쉽지 않을 터다.
마지막으로 유럽은 단기적으로 러시아의 보복 조치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유럽이 러시아 자금을 몰수한다면 러시아는 아직 자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럽 기업의 재산을 대상으로 몰수 조치에 돌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전쟁이 발발한 뒤 대다수의 유럽 기업은 이미 러시아의 사업을 정리하고 떠났으나 아직 활동하고 있는 기업들도 소수 존재한다. 이들의 재산권이 보호받지 못하리라는 사실은 거의 명백하고 이러한 위험은 유럽의 정책 결정 방정식에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것이다.
12월 중 유럽연합 이사회 최종안 결정
유럽연합에서는 현재 러시아 자산의 몰수라는 무리수를 피하면서 동시에 이를 활용해 전쟁의 피해국인 우크라이나를 돕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메르츠 총리는 지난 9월 유럽 방위강화 방안으로 러시아 동결 자산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에 1400억유로 규모의 지원을 계획하고 있음을 밝혔다.
지금까지 유럽은 러시아 자산이 아니라 자산에서 나오는 이자만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사용한 바 있다. 지난 3년 동안 규모는 총합 50억유로에 해당한다. 그리고 미래에 도출되는 이자를 바탕으로 450억유로에 달하는 우크라이나 지원 채권을 발행한 바 있다. 자산의 몰수를 피하면서 러시아 자금으로 우크라이나를 돕는 금융기법인 셈이다. 메르츠 총리의 안은 규모가 훨씬 크고 차원이 다르다.
현재 EU에서는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해 주요 정부 간에 긴밀한 협상이 진행 중이다. 벨기에정부는 러시아 자산을 담보로 새로운 우크라이나 지원을 결정한다면 EU 회원국이 공동으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리스크에 대해 책임을 공유하자고 주장한다. 벨기에 혼자 ‘독박’을 쓸 수는 없고 경제적 비중에 따라 책임을 나누자는 말이다. 유럽의 목표는 앞으로 한달 동안 합의를 만들어 오는 12월 18~19일에 개최되는 유럽연합 이사회에서 최종안을 결정하겠다는 일정이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세력이 기존 민주 질서를 교묘하게 활용하듯, 국제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도 기존의 법이나 규칙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주권국가의 존재 자체를 무지막지하게 폭력으로 부정하는 러시아 세력조차 유럽을 지탱해 온 법치와 소유권 보호 장치에 크게 의존하는 모양새다.
공정과 법치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대립과 투쟁이라는 긴급한 필요 사이에서 유럽은 어려운 길을 찾아가고 있다. 2400여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투키디데스가 이미 지적한 옳은 것(right)과 필요한 것(necessary) 사이의 긴장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