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통상규칙 바뀌는데 한국은 준비됐나

2025-11-20 13:00:01 게재

세계 통상질서가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방향을 틀고 있다. 겉으로는 관세와 무역마찰이 반복되고 있지만 교역을 움직이는 규칙과 판단기준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세계화 시대가 가격과 효율성 중심의 최적 조합을 찾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통상은 공급망 안정성, 기술 의존도, 지정학적 리스크 관리가 중심축이다.

10월 체결된 미국–말레이시아 협정은 이러한 전환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이 특정국을 안보위험으로 규정해 조치를 취하면 말레이시아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도록 설계돼 있다. 시장 접근을 넓히는 과거 협상방식이 아니라 양국 대외경제정책을 하나의 전략 틀로 묶는 구조다. 여기에 기술통제 투자심사 원산지규정이 연결되면서 통상은 사실상 전략정책의 핵심도구가 되고 있다. 경제적 효율성보다 전략적 목표를 우선시하는 제도적 장치다.

같은 시기 체결된 미국–호주 협정은 희토류·갈륨 등 전략광물을 공동 관리하고 비중국계 공급망을 확충하는 공동투자와 비축체계를 제도화했다. 내용은 달라도 말레이시아 협정과 같은 흐름을 반영한다. 광물 공급망을 단순 조달 경로가 아닌 안보 인프라로 간주하는 전환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글로벌 통상질서가 단일 규칙에서 다층적 규범 체제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략적 고려가 통상구조를 바꾸고 있으며 기술 에너지 데이터 등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통상정책이 효율성에서 안정성으로 단기비용보다 장기안정성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맹결속, 중국은 파트너 다변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중국은 어떤 대응을 선택하고 있을까. 중국은 희토류·흑연·자석소재 등 전략광물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정제 능력을 확보해 공급망의 중요한 축을 형성해왔다. 미국이 비중국계 공급망을 급속히 구축하려 하자 중국은 내부 역량 강화와 외부 협력 확대라는 양방향 전략을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대내적으로 반도체, 배터리 소재, 신에너지 장비, 산업용 소프트웨어 등 핵심 분야에서 국산화 목표를 더욱 높이고 있다. 단기성과보다 산업사슬 전반의 취약구간을 보완하는 데 정책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일부 기술과 광물에 대해서는 수출관리 제도를 활용해 전략적 조정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미중 기술경쟁이 장기화할수록 중국 스스로 안정적 산업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내년부터 시작하는 ‘15차5개년 계획’ 기간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경제협력의 지리적 범위를 대폭 확장하고 있다. 동남아·남아시아·중동·아프리카와 생산·조달협력이 강화되고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기반으로 한 생산 네트워크도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이는 공급망 및 시장 리스크를 분산하고 미국 중심 규범과 구별되는 다층적 경제 협력 공간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시도다.

중국정부가 최근 ‘공급망 안정 유지’를 핵심 정책 목표로 제시하며 산업·물류·에너지시스템을 하나의 통합 구조로 관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미국은 동맹 중심 결속 전략을, 중국은 파트너 다변화 전략을 택하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통상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 있다. 두 체계가 평행하게 확장될수록 글로벌 통상질서는 더 복잡한 다층 구조가 될 것이다. 어떤 규범을 택하고 어떤 기술과 광물을 어느 국가로부터 조달할지에 대한 선택이 장기 발전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과제가 무겁다. 핵심광물과 첨단기술, 전략장비 등 각 분야별로 특정 국가 의존 현황을 정밀하게 점검해야 한다. 적용할 기준과 규범에 대한 분명한 원칙을 선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미국 중심의 경제안보 체계와 중국·아세안 협력 구도 사이에서 분야별 기준과 방침을 세밀하게 조정하는 균형잡힌 전략이 요구된다. 나아가 단순한 규범 수용자를 넘어 새로운 규범 형성 과정에서 우리 목소리를 내고 실질적 역할을 확보해야 한다.

한국, 선제적 전략과 시나리오별 준비 필요

기업과 정부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통상 환경을 단기적 성과 위주로만 바라본다면 장기적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어떤 규범과 네트워크 속에서 경쟁할지에 대해 중장기 전략이 없다면 궁극적으로는 선택지가 제한될 것이다. 이는 통상·산업·기술 정책을 통합적으로 설계할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한국은 여러차례 위기를 겪으며 공급망의 중요성을 실감해왔지만 이제는 위기상황 대응 수준을 넘어 선제적 전략과 시나리오별 준비가 요구된다. 동맹과 파트너, 시장과 안보를 둘러싼 모든 선택을 장기적인 로드맵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통상환경의 변화를 제대로 읽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역량이 미래성장을 좌우할 것이다.

박한진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전 코트라 중국지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