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강대국 눈치보는 ‘표현의 자유 규제’의 위험성

2025-11-20 13:00:01 게재

전광용의 단편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 이인국의 독백 “흥 그 사마귀 같은 일본놈들 틈에서 살았고 닥싸귀 같은 로스케 속에서도 살아났는데 양키라고 다를까”는 학생시절 이후 필자의 뇌리 한켠을 깊이 차지해왔다.

1900년대 중반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해방, 그에 이은 남북분단과 미소점령, 6.25라는 민족상잔(民族相殘)과 같은 동북아의 지정학적 대격변 한가운데를 살았던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이보다 더 함축적으로 보여준 구절이 있을까?

그런데 혹시 ‘일본놈’ ‘로스케’ ‘양키’라는 일견 상스러운 표현들이 많이 불쾌한가? 하지만 필자에게는 이런 표현들 속에서 다른 국가와 민족에 대한 비하나 모욕보다는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침해한 국가나 민족에 대한 깊은 원망과 분노가 느껴질 뿐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필자의 외할머니 또한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의 가혹한 수탈을 회상할 때면 필자에게 분한 감정을 표출하면서 일본인들에 대해 “왜(倭)놈”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분이 늘 일본인들에 대해 부정적이셨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인들의 앞선 문화와 예절은 반드시 우리도 배워야 한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혐오표현' 사회적 대응 성격 강해

필자의 대학 시절, 일부 선배들은 이른바 ‘미제’(미국제국주의)와 ‘미제 앞잡이’를 비판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서 ‘양키’라는 표현이 빈번히 들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양키 고 홈(Yankee Go Home)”이라는 표현은 그저 미국과 미국인을 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패권국가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개입 또는 영향력 행사에 반대하는 구호였다. 이것은 지금도 일부 진보진영 인사들이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문재인정부 시절 ‘노 재팬(NO JAPAN)’ 운동 또한 이웃국가 일본에 대한 단순한 분노 표현이 아니라 당시 아베정부의 우경화, 수출규제 조치, 그리고 축적된 한일 역사 갈등이 촉발한 사회적 대응 성격이 강했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침략을 받았고 그에 대응해 이들 국가와 민족에 대한 다양한 멸칭(蔑稱)을 만들어 사용해왔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내 혐한인사들이 ‘조센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우리 민족에 해를 끼치지 않은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는 별다른 멸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약소국가나 민족을 우습게 여겨 비하하는 멸칭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결코 다른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배타적 혐오 감정을 배설하기 위해 그들에 대한 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한 멸칭들은 우리 민족의 민족적 자주성과 국익을 침해하거나 위협하는 외세를 식별하고 이를 일깨워 대응하기 위한 민족적 혹은 국가적 자각의 일환으로 사용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세계대전으로 점철된 1900년대 초중반처럼 글로벌 지정학의 시대가 귀환했고, 세계질서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러한 지정학적 대격변 가운데 현재 정부는 일부 집회와 시위에서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표현이 심각하다는 이유로 강력 대응을 시사하고 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특정 국가에 대한 혐오표현을 처벌하기 위한 입법까지 발의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재의 정당성 여부는 결코 헌법 상 ‘표현의 자유’와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하는지 여부와 같은 법적 테두리 안에서만 논의될 쟁점이 아니다.

공론 형성 기능 마비시킬 위험성 지녀

특정 국가에 대한 멸칭 사용의 본질은 그에 내재된 글로벌 지정학적 담론 형성 활동, 다시 말해 급변하는 지정학적 현실에서 우리나라가 어떠한 민족적 국가적 미래를 개척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 국민의 각성운동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주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혐오표현을 문제삼아 그러한 표현을 엄격하게 제재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지금과 같은 지정학적 대격변 하에서 진정 어느 세력이 우리의 민족적 국가적 위협이고, 어느 세력이 우리의 우방인가를 식별하고 알리려는 우리 국민의 민족적 국가적 자각과 공론 형성 기능을 마비시킬 위험을 내포하는 점에서 매우 우려된다.

박진표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