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내란과 대장동 진실게임

2025-11-20 13:00:03 게재

이른바 내란재판을 보는 시민들은 당혹스럽다. 윤석열과 김용현의 내란혐의 공판을 진행하는 지귀연 재판부가 그렇다. 웃음 띤 얼굴로 점심시간을 걱정하는 재판부는 마치 예능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시민들은 선고결과도 우려한다. 혹시 기교사법을 통해 윤석열을 풀어준 뒤 후속 재판부나 항소심에 떠넘기는 것 아닐까. 구속기간을 날 아닌 시간으로 계산해 윤석열을 풀어주고 공수처 수사권 문제를 거론하며 질질 끄는 재판부터 미심쩍다는 거다.

한덕수 내란방조혐의 공판은 대조적이다. 이진관 재판장은 직접신문도 하면서 출석에 불응하는 증인에게 과태료를 따박따박 부과한다. 결심과 선고 일정도 분명히 예고한다. 늦게 시작한 한덕수 재판이 윤석열보다 먼저 선고될 전망이다.

한편으론 서울중앙지법의 영장전담판사들에게 의혹의 눈길이 쏠린다. 박성재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두차례 영장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비상계엄의 위법성 인식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거다. 자칫 내란의 밤 대법원의 대책회의도 문제가 되거나 특검의 수사대상에 오를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라는 해석이 제기된다. 내란 선동선전혐의 황교안 전 대표에 대한 영장기각도 ‘윤 어게인’ 동조세력에 자신감을 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도대체 내란 1년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정리되지 않다니. 지체된 정의는 불의에 가깝다고 하지 않나. 혹여 윤석열과 김용현을 위시한 몇몇의 한밤 불장난으로 치부하고 단죄대상도 최소화하려는 것일까. 우리 사법부가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 맞나.

내란재판·대장동사건의 법원 태도 주목

최근에는 대장동 사건 1심 판결 이후 ‘항소포기’와 ‘조작기소’를 두고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검사장 18명이 연대 반발한 항소포기는 정권의 외압인가 노만석 검찰총장 대행의 독자적 판단인가. 추징이 무산됐다는 7886억원 초과 이익은 부풀린 것인가 아닌가.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정영학은 검찰이 부풀려 증거를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진실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이재명 대통령을 겨냥한 강압 수사와 조작기소 여부가 관심사다. 20대 대선기간부터 ‘대장동=이재명’은 검찰수사의 대전제였다. 그런데 대장동 사건과 관련한 재판에서 검찰의 강압과 조작 증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 징역 4년형이 선고된 남 욱 변호사는 이재명 대통령 측근인 정진상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검사가 애들 사진을 보여주며 배를 가른다 했다. 회유된 진술이 유죄증거가 돼 괴롭다”고 폭로했다. 지목된 검사는 “비유로 말했다. 배를 가른다고 하지 않고 ‘개복’이라 했다”고 변명했다.

대장동 사건 핵심증거인 정영학 회계사의 녹취록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원래 1기 수사팀에서 작성한 녹취록 중 “재창이 형…”을 “(정진상)실장님…”으로, “위례신도시”를 “윗 어르신들”로 2기 수사팀이 둔갑시켰다는 거다. 문제가 되자 수사팀은 “속기사의 실수”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딱 이 부분으로 검찰이 이재명 대통령 연루 의혹을 걸었다는 점에서 실수인지 조작인지 규명이 필요하다.

내란도 대장동도 이제 법원의 시간이다. 노르웨이 법학자 한스 페터 그라버 교수가 2015년 도발적인 책을 낸다. 바로 ‘정의를 배반한 판사들’이다. 부제가 흥미롭다. ‘판사들은 왜 불의와 타협하는가.’ 그는 나치 독일과 나치 점령기의 유럽 국가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독재정권에 부역 또는 동조한 법관들 사례를 든다. 현대 미국과 영국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판결도 소개한다.

정의를 수호해야 할 판사들이 왜 불의와 타협할까. 페터 그라버는 그들이 법률가인 동시에 조직 구성원이기 때문으로 본다. 정의의 수호자보다는 일신의 안위와 승진을 추구하는 관료적 직장인으로 처신한다는 거다. 너무 현실적인가.

무엇보다 ‘법 기술주의’를 악용하는 방식으로 타협한다고 했다. 판결의 도덕적 가치나 정의의 원칙을 외면하고 형식적 법률 해석과 절차의 합법성만 따진다는 거다. “악법도 법”이란 논리로 현실의 폭력과 불의에 면죄부를 준다는 거다.

형식적 합법성에 갇힌 판결은 껍데기만 법치주의일 뿐 실제적 정의는 오히려 질식하게 된다. 진정한 법치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려는 판사들 내면의 정의와 도덕적 용기 위에서 꽃피울 수 있다. 안팎 권력의 유혹과 압박속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함으로써 말이다.

사법부에 진정한 ‘법과 양심’ 묻는다

프랑스의 법률가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나에겐 나의 법정이 있고 재판이 자주 열린다”고 했다. 자신이 충직하고 헌신적인지, 비겁하고 잔인한지 아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법과 양심’의 문제 아닐까.

우리 법관들은 자신의 법정이 있는가.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은 독립을 부르짖는 사법부에 진정한 ‘법과 양심’을 묻는다. 사법부가 진실과 정의의 편인지, 기득권 편인지는 결국 자신의 결정에 달렸다.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