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아프리카 질서, 우리에겐 기회다

2025-11-24 00:00:00 게재

미국 AGOA 폐지로 국제 무역질서 균열…‘원조대상’에서 ‘글로벌 핵심파트너’로 재정의

미국의 국제개발처(USAID) 규모 축소 이후 후속탄이 아프리카 대륙에 투하되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재정 효율성을 내세워 아프리카성장기회법(AGOA, African Growth and Opportunity Act)을 폐지했다.

2025년 9월 30일 미국의 AGOA이 연장 없이 종료되면서 국제 무역질서에 균열이 생겼다. 이는 미국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전략적 영향력의 닻을 스스로 거둬들인 사건이며, 그로 인해 생긴 거대한 힘의 공백을 차지하려는 강대국들의 ‘새로운 경쟁’을 알리는 서막이다.

2024년 9월 3일 케냐 윌리엄 루토 대통령과 악수하는 시진핑 국가주석 사진: 연합뉴스

강대국들의 ‘새로운 경쟁’ 알리는 서막

AGOA는 지난 25년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30여개국에 미국 시장을 무관세로 개방해주며 산업화의 발판을 마련해준 ‘특혜 무역법’이었다. 그런데 AGOA의 종료는 무엇보다도 미국의 아프리카 영향력 약화를 예고한다.

그동안 아프리카 국가들은 섬유 의류 자동차부품 등을 미국으로 무관세 수출하며 고용을 창출하고 산업 기반을 확충해 왔다. 그러나 이제 이들 품목은 다시 관세장벽에 부딪히게 되었고, 케냐 레소토 에스와티니 등 주요 수출국에서는 약 130만개의 일자리가 위협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는 단순한 무역손실이 아니라, 아프리카 국가들이 미국을 ‘안정적 파트너’로 신뢰하기 어려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중국의 아프리카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AGOA라는 경제적 지렛대를 활용해왔다. 더욱이 AGOA는 경제적 혜택을 넘어 법치주의·인권·다원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 가치 확산을 위한 소프트 파워이자 정치적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법의 종료로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규범적 영향력을 행사할 통로를 잃었고, 경제·외교·안보관계 전반에 전략적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다.

중국 ‘내정 무간섭 원칙’은 매력적 선택지

이 공백을 메우려는 경쟁은 본격화되고 있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는 국가는 단연 중국이다. 이미 아프리카의 최대 무역 파트너인 중국은 ‘일대일로’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의 혈맥과 같은 인프라를 장악하고 있다.

2024년 9월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FOCAC)에서 향후 3년간 507억달러(약 73조85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하며 AGOA 종료로 판로가 막힌 아프리카산 제품을 흡수할 태세다.

민주주의나 투명성 같은 정치적 조건을 내걸지 않는 중국의 내정 ‘무간섭 원칙’은 즉각적인 경제성과가 필요한 특히 장기집권을 노리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고 있다.

‘규범 기반의 파트너’ 내세우는 EU

유럽연합(EU)은 지리적 근접성과 역사적 유대를 바탕으로 ‘규범 기반의 파트너’임을 내세운다. 이미 경제 동반자 협정(EPA)을 통해 아프리카 국가들과 안정적 무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EU는 일방적 특혜였던 AGOA와 달리 상호 협력을 강조하며 아프리카의 개발 목표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심화해 가고자 한다.

‘글로벌 게이트웨이’ 구축을 통해 인프라, 에너지 전환(Green Deal), 디지털 연결성 등 지속가능한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중국의 ‘부채 함정 외교’와 대비되는 대안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아프리카 내 영향력 확대에 초점

러시아는 경제적 측면보다는 안보와 정치적 유대를 통해 아프리카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러시아는 바그너 그룹 등의 용병 파견, 군사 장비 및 훈련 제공 등을 통해 사헬 지역, 중앙아프리카 지역 등 불안정한 지역의 정부들에 안보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며 광물자원 개발권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서방국가들이 인권이나 민주주의 문제로 인해 거리를 두는 국가들에게 특히나 매력적인 대안이 되고 있다. 또한 곡물, 에너지 등 전략적 자원을 활용한 외교와 더불어 UN 등 국제무대에서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지하며 반서방(反西方) 정서를 부추기고 정치적 연대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상호 호혜적 발전의 ‘강소국 협력 모델’

무조건적 원조 확대의 직접적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2025년 말 아프리카 주요 선거들의 흐름은 정치적 안정성이라는 겉보기 이점을 제공하는 동시에, 권력집중과 민주주의 후퇴, 시민사회 공간의 축소, 거버넌스 리스크 등 중장기적 위험을 함께 드러내고 있다.

AGOA 종료 여파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한국 기업은 에티오피아 케냐 마다가스카라 등 아프리카에서 생산기지를 운영하며 저렴한 노동력과 AGOA 혜택을 활용해 대 아프리카 수출 중 상당 부분을 미국 시장으로 연결해 왔다.

그러나 무관세 혜택이 사라지면서 이들 기업의 경쟁력은 약화되면서 생산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이 위기는 ‘단순 수출의존형’에서 ‘전략적 동반자’로 도약할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우선, 정부와 유관기관은 피해를 입은 한국 기업들을 위한 시장 다변화와 구조조정에 관심을 갖아야 한다. 미국 대신 EU 아시아 중동 등 새로운 수출시장으로의 전환을 지원하면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바로 3조4000억달러 규모의 거대 단일 시장인 ‘아프리카대륙자유무역지대(AfCFTA)’를 활용하는 것이다. 미국의 AGOA가 양자 간 무관세로 호혜적 관계 중심이었다면, AfCFTA는 14억 인구를 포괄하는 범대륙적 시장으로 확장할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는 아프리카와의 FTA/EPA 협상을 신속히 추진해 장기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무역기반을 확보하여 가치사슬을 고도화할 필요가 있다.

USAID 축소와 AGOA 종료로 미국 의존도가 낮아진 지금 아프리카 국가들은 새로운 협력 모델을 갈망한다. 이때 우리만이 제시할 수 있는 모델이 있다. ‘일방적 특혜’도 ‘거대 자본’도 아닌 상호 호혜적 발전, ‘강소국 협력 모델’이다.

우리의 선진 기술력과 아프리카의 자원을 결합함으로써 핵심 광물 및 청정에너지 협력의 다변화를 꾀할 수 있으며, 포용적 성장과 상호보완적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차별화된 협력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

중국이 항만과 철도 같은 하드 인프라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디지털·보건·교육·스마트팜 등 ESG와 지속가능발전목표(SDGs)와 연계된 ‘사람 중심의 지속가능한 인프라’에서 각별한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이는 한국이 아프리카의 자립적 성장에 기여하는 ‘신뢰할 수 있는 중견국 파트너’로 자리매김하는 길이다.

나아가 2024년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이후 사라져만 가는 관심을 되살리고 이를 정례적 협력 플랫폼으로 제도화해야 한다. 제2, 제3의 ‘한-아프리카 정상회의’는 교류와 신뢰를 심화시키는 상징적 무대가 될 것이다. 며칠 전 남아공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는 우리가 아프리카의 주체적 성장을 지원하는 실질적 동반자로 발돋움할 계기가 될 것이다.

‘글로벌 핵심 파트너’로 재정의할 기회

결국 AGOA의 종료는 미국에게는 전략적 영향력이 흔들리는 모습이지만 우리에게는 ‘원조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아프리카를 ‘글로벌 핵심 파트너’로 재정의할 기회다. 세네갈의 월로프족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꿀을 원하는 사람은 벌과 과감히 맞설 용기를 가져야 한다.”

미중경쟁이 심화되고 다극화가 가속화되는 신냉전적 국제질서 속에서 우리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협력의 설계자이자 중재자로 나서야 한다. 지금이 바로 아프리카의 미래와 함께 성장하는 한국의 비전을 구체화할 때다.

김성수 한양대 교수, 정치외교학 유럽아프리카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