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급등으로 소비자물가 압박 현실화
한때 환율 1475.6원, 원화 실질가치 16년 만에 최저
원·달러 환율이 1470원대까지 치솟으면서 소비자물가 압박이 커지고 있다. 생산자·수입물가가 동반 상승하며 소비자물가까지 자극하는 ‘고환율-고물가’ 고리를 단기간에 끊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소비자가격 상승은 당장 장바구니물가부터 영향을 주고 있다. 가공식품과 외식 가격 상승세가 거세다. 특히 고환율에 따른 석유류 가격 상승이 물류·유통비 전반의 연쇄상승으로 이어지면서 연말 물가 불안을 키울 것이란 경고가 나온다.
◆1500원대 환율 전망도 = 24일 외환당국에 따르면 올해 들어 원·달러 환율은 글로벌 달러 강세, 지정학적 리스크, 내국인의 해외투자에 따른 자금 유출 등으로 1400원대를 장기간 유지하다가, 지난 21일 7개월 만에 최고치인 1475.6원으로 마감했다. 시장에서는 1500원 돌파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24일 오전 9시 현재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472원에 거래되고 있다.
최근 원화의 실질가치도 급락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한국의 실질실효환율은 89.09이다. 금융위기 이후 1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내국인의 해외 주식 투자 급증 등이 원화 약세를 심화시키면서, 수입물가와 생산자물가에 추가적인 상승 압력을 키우고 있다.
고환율 영향은 기초 물가 지표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0월 생산자물가지수는 120.82(2020년=100)로 전월 대비 0.2% 상승하며 두 달 연속 올랐다.
생산자물가 상승의 배경은 고환율로 수입 원재료 비용이 늘어난 데 있다. 환율이 오르면 같은 조건으로 원자재를 들여오더라도 기업의 원화 지출이 커진다. 결국 제조·서비스업 전반의 생산 비용을 높여 공산품·가공식품·중간재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수입물가도 4개월 연속 상승했다. 10월 수입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1.9% 오른 138.17로 올해 1월 이후 가장 큰 폭을 기록했다. 수입 대부분이 달러로 결제되는 만큼 환율이 오르면 국제 가격 변동이 없더라도 원화 기준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에너지·광물·곡물 등 원재료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 구조상 환율의 영향은 더 즉각적으로 반영된다. 수입물가 수개월 시차를 두고 국내 소비자가격에 반영된다.
◆기재부·국민연금·한은 ‘환율 논의’ = 10월 소비자물가도 전년 대비 2.4% 상승하며 지난해 7월 이후 가장 큰 폭을 보였다. 석유류(4.8%), 축산물(5.3%), 가공식품(3.5%) 등 수입 의존 품목들이 상승세를 주도하며 고환율의 여파가 소비 단계까지 이어지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단기적으로는 환율이 하락할 뚜렷한 요인이 없다고 보고 있다. 한미관세 협상 등 일부 불확실성이 정리됐지만 외국인 자금 유출이 이어질 경우 원화 약세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고환율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이 이미 누적돼 있어, 달러가 약세로 돌아서도 원화 기준 가격은 단번에 내려오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이때문에 환율이 1400원대 아래로 내려가기 쉽지 않고, 대외불확실성이 커지면 1500원대 이상으로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강삼모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환율 상승은 수입품 가격을 끌어올리고, 이는 운송·유통비 상승을 거쳐 소비재 가격 전반에 영향을 준다”며 “정부는 소비 진작 정책을 자제하고 한국은행은 통화 긴축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편 달러·원 환율 급등세에 대응해 정부와 국민연금은 조만간 비공개 회의를 열고 외환시장 안정 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로 인한 달러 수요가 환율 상승을 자극하는 구조적 요인을 완화하는 방안이 주요 의제로 거론된다. 다만 국민연금은 ‘수익성 우선’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정부와 입장 차이가 있다. 정부는 고환율의 물가 파급효과를 계속 예의주시하며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