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남식의 중동 톺아보기
중동의 정상들이 한국을 반기는 이유
이재명 대통령의 숨가쁜 중동 정상외교가 지난주 펼쳐졌다. 남아공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계기에 아랍에미리트를 필두로 이집트와 튀르키예를 연이어 방문하는 강행군이었다. 카이로대학 연설에서는 안정(Stability) 조화(Harmony) 혁신(Innovation) 연결(Network) 교육(Education) 등 다섯가지 비전의 머리글자로 구성된 중동정책 구상을 밝혔다. 이른바 SHINE 구상이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걸프 3개국 순방 때 발표된 ‘한중동 미래협력 구상’을 더욱 구체화한 내용이다. 그만큼 시대의 변화는 빠르고 협력의 의제도 달라졌다.
우연이겠지만 이번에 방문한 세 나라는 각기 다른 묘한 상징성이 있다. 문명의 시원(始原) 고대 제국의 후예 이집트, 지중해 패권을 장악했던 중세 오스만 제국의 후예 튀르키예와 1971년 건국한 신생국으로 번영의 업적을 이룬 현대국가 아랍에미리트는 서로 무척 다르다. 고대와 중세, 그리고 현대를 아우른다.
2차대전 이후 냉전기 중동 정치사에서도 세 나라는 각기 다른 궤적을 그렸다. 이집트는 비동맹 외교정책과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아랍민족주의를 이끌었다. 처음에는 소련 및 북한에 더 가까웠다. 반면 튀르키예는 6.25 때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 희생을 감수한 혈맹이다. 나토 회원국으로 강력한 반공자유진영의 우방이기도 했다. 신생 독립국 아랍에미리트는 냉전 진영으로부터는 자유로웠지만 서방과 연대를 바탕으로 석유에 기반한 절대왕정의 국내 안정과 발전에 매진해왔다.
UAE ‘미래’, 이집트 ‘사람’, 튀르키예 ‘외교’
이처럼 중동은 동질적인 지역이 아니다.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으나 나라마다 처한 현실과 관심과 고민 그리고 미래비전과 국가목표가 천양지차다. 따라서 우리의 중동정책 역시 뭉뚱그려서 하나로 펼칠 계제가 아니다. 이번 순방에서도 국가별로 맞춤형 협력 의제들이 논의되었다.
아랍에미리트와는 미래첨단분야의 구체적 사안들을 공동 추진하기로 했다. 초기 투자만 30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협력 사업들이다. 단순히 액수의 문제가 아니다. 석유 시대 이후 국가의 미래를 인공지능(AI)에 두고 있는 아랍에미리트는 ‘UAE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었다. 아부다비에 조성하는 대규모 데이터센터 클러스터에 한국이 공동투자해 인프라구축 공급망 연구개발 등 전분야를 망라하며 협력하기로 했다.
기존의 바라카 원전으로 쌓은 협력체계를 더 발전시켜 에너지 믹스를 통한 AI 기반 전력을 안정적으로 생산·공급하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협력구도를 마련했다. 방공망 및 한국형 전투기 사업 등 방위산업 분야도 협력의 폭이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와는 평화, 그리고 사람에 방점을 찍었다. 가자 휴전협상 과정에서 적극적 중재노력을 보여준 이집트의 평화기조는 오랜 분쟁의 또 다른 상징인 한반도와도 연결될 수 있다. 양국 정상은 중동과 동북아 분쟁해소 및 평화구축에 한국과 이집트가 연대하고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이집트의 경제환경은 여타 아랍 산유국에 비해 열악하다. 수에즈 운하와 나일의 비옥한 토지를 가졌음에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데에는 여러이유가 있겠지만 교육 여건이 불비한 탓도 크다. 아랍 최대의 인구 대국이 이집트다. 사람이 곧 자원인 나라다. 엘시시 대통령은 이 점을 강조했다. 한국전쟁 후 잿더미가 되었던 극빈의 나라에서 부존자원 하나 없이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성장한 이유는 인적자원, 즉 교육이었음을 그는 알고 있다. 어떤 형태든 한국과의 교육 협력을 통해 사람의 힘을 이끌어내고 싶은 엘시시 대통령의 의지는 강력했고 이재명 대통령은 이에 화답했다. 향후 이집트와 한국은 오랜 문명과 역사의 힘을 현대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바꾸어나가는 데 함께하기로 했다.
형제국가라 일컫는 튀르키예와는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를 보다 내실있게 다지는 구체적 사안들을 논의했다. 기존의 방산협력을 더욱 심화하고, 원전 분야 개발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 바로 튀르키예가 중동외교의 핵심 행위자라는 점이다. 국제무대에서 외교 파트너로서의 의미가 크다. 기존의 믹타(MIKTA, 한국 주도로 결성한 멕시코 인도네시아 튀르키예 호주 등 민주주의 중견국 협력체)와 같은 협력대상을 넘어 다자무대에서 긴밀한 협력 파트너로 굳건히 자리매김하려는 의지를 양 정상이 재확인한 셈이다.
한국은 자산·역량 있지만 위험하지 않은 파트너
이번 중동순방 3개국의 핵심 의제는 각각 미래(아랍에미리트), 사람(이집트), 외교(튀르키예) 등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나라 정상들은 한결같이 한국과의 협력을 강력히 희망했다. 특히 첫 기착지 아랍에미리트의 환대는 강렬했다. 한해에 꼭 두차례만 한정해 국빈을 맞는 아랍에미리트다. 2023년에 이어 이번에 2년 만에 다시 한국 대통령을 국빈으로 맞았다. 이례적이다. 이집트와 튀르키예의 열정적 반응도 인상적이었다. 정상외교의 본령은 환대에 있다지만 형식적인 의전을 넘어서는 각별한 애정은 금세 드러난다. 이번이 그랬다.
그렇다면 중동의 정상들은 왜 이렇게 한국을 반기는 것일까? 앞서 살펴본 협력의 의제들이 많고 중요해서일까? 그렇다. 하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중동 여러나라들이 바라보는 한국은 협력 사안을 뛰어넘는 매력과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쇼비니즘 류의 자화자찬이 아니다. 현지에서 만나는 주요 인사들과 오랜 교분을 통해 듣게 된 그들의 솔직한 속마음이다.
그들은 한국이 편한 친구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강대국 정치가 횡행하는 시대다. 중동의 주요 협력국은 주로 미국과 유럽 즉 서방 아니면 최근 중동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국과 러시아로 갈린다. 강대국과의 불편한 협력에 의존하다가 진영에 포획되어 자칫 불평등한 관계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렇기에 열강의 영향권에 복속되지 않고 일정부분 위험 회피를 할 파트너가 필요하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역량과 자산을 갖고 있는 파트너여야 한다. 이때 한국이 눈에 자꾸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다.
전쟁이 만연하고 안보위험이 상존하는 중동국가들에게 한국의 방산시스템은 가격과 성능비가 뛰어나다. 신속한 조달도 가능하다. 기술 이전 면에서도 서방 선진국처럼 까다롭지 않다. 이미 K9자주포, K2전차 등 지상군 무기와 현무, 천궁 등 방공미사일체계, KF21 개발 등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한편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AI 인프라를 구축하고 싶은 걸프 산유국에게 한국의 반도체 역량은 중요한 관심사가 된다. 높은 제조업 기술력은 이들이 얻기를 희구하는 한국의 강점이다. 후일 휴머노이드 등 물리적 AI가 구현될 때, 한국의 제조역량이 빛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피력한다.
석유 건설 넘어 새로운 협력 만들 출발점
여기에 한국이 갖는 서사의 힘이 덧대어진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불과 반세기 만에 상전벽해를 이룬 나라에 대한 일종의 경이감과 부러움이다. 50년 전, 지금은 노인이 됐을 당시 20~30대 청년들은 뜨거운 사막에서 지반을 다지고 길을 놓았다. 등짐을 지고 비계를 오르며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국산 5세대 전투기 협력을 이야기한다. 원전을 안정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고, 최첨단 AI와 반도체, 바이오 등 미래 산업 분야에서 고도화된 기술로 서방 선진국들과 경쟁한다.
중동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식민 경험과 연관된 유럽이나 강대국 미중 경쟁관계의 부담에서 눈을 돌려 기적의 역사를 써내려 온 한국에 관심과 호기심을 갖고 있다. 지난 50년을 넘어 이제 새로운 50년의 협력모델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젠 석유, 건설에 국한된 협력의 시대를 넘어 미래와 사람과 외교 파트너의 입체적 유기적 파트너십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100년 친구의 첫 걸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