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인류가 ‘냄비 속 개구리’ 신세를 면하려면
“금세기 말 지구 기온을 산업혁명 이전보다 1.5℃ 이상 상승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10년 전 195개 나라가 파리협정을 체결하면서 약속한 기후변화의 마지노선이다. 그러나 그 마지노선을 지킬 수 있다는 전망은 희박해지고 있다.
탄소감축 등 구체적 실행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브라질 아마존강 입구 도시 베렝에서 11월 10일 개막한 제30차 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30)가 물에 물탄 듯 뚜렷한 성과도 없이 21일 폐막했다.
외교관 기자 환경활동가 등 5만여명이 모였지만 정작 미국은 정부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다. 온실가스 누적 배출 세계 1위국이자 국제질서를 이끌어야 할 나라가 빠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파리협정 탈퇴를 선언했을 때부터 예상된 일이긴 하지만 30년의 COP 역사상 미국이 이렇게 일탈한 적은 없었다.
1992년 리우지구정상회의(Earth Summit)에서 100여국 정상이 모여 기후변화협약을 체결하고 ‘기후위기를 반드시 막겠다’고 약속한 지 33년에 이르렀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지구온난화는 지금도 가속을 멈추지 않는다. 2024년 지구 평균기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산업혁명 이전에 비해 현재 1.3℃ 상승했다. 이 상황에서 1.5℃ 이내 억제가 가능하다는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이 33년 동안 인류는 기후위기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막는 데에는 실패했다.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구조적 습성 때문이다. 정치는 임기 내 성과를, 시장은 분기별 이익을, 개인은 더 많은 소비를 탐닉한다. 이 세 가지가 맞물리자 기후위기는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되었다.
지금 기후위기는 문명사적 충격의 전조
‘냄비속 개구리’ 일화는 기후변화에 둔감한 인류를 꼬집는 비유로 곧잘 회자된다. 냄비 물의 미지근함에 적응하다 끝내 탈출하지 못하여 죽고마는 것은 개구리가 어리석어서라기보다 급격한 변화만을 경고음으로 인식하는 생존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AI) 기술이 기후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희망을 말한다. 에너지 효율화, 정밀한 예측, 탄소포집 기술 고도화 등 기대가 크다. 하지만 AI를 구동하는 데이터센터가 쓰는 전력은 이미 일부 국가의 연간 탄소배출량을 넘어섰다. 최근 5년 사이 증가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기후위기를 해결할 기술이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역설, 이것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구조적 딜레마다.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은 인류가 기후위기의 물리적 결과를 실제보다 훨씬 가볍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폭염과 홍수는 ‘일상적 불편’ 정도로 소비되고, 가뭄과 전염병은 ‘재난 영화의 장면’처럼 느낀다. 변화의 규모를 선형적으로 단순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과학이 말하는 미래는 기하급수적 변화다. 임계점이 넘어가면 한번 무너진 지구 시스템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 지역의 생태계 붕괴는 곧 세계 식량공급망의 붕괴로 이어지고, 물 부족은 지역 분쟁을 넘어 국가 간 충돌로 확산되고 심지어 핵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지금의 기후위기는 자연재해가 아니라 문명사적 충격의 전조다. 그래서 존재의 위기라는 인식이 나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희망을 말한다. 희망을 말하도록 설계된 존재인 듯싶다. 종말을 예감하면서도 문명을 확장해온 역사를 보면인간은 비관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방식으로 희망을 말하며 살아왔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그 출처를 떠나 인간이 위기 속에서도 오늘을 지키고 책임을 다하려 해 왔던 태도를 상징한다. 끝을 보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 그저 오늘의 행동을 오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인간이 가진 마지막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비관은 미래를 경계하기 위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비관이 무력함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기후위기 극복은 정치권력의 허장성세, 외교관들의 협상기술, 전문가들의 과학이론, 운동가들의 아우성만으론 아주 모자랄 것 같다. 감성적 희망으로 속도를 재조정하려는 집단적 결심이 있어야 한다.
거창한 선언보다 실질적 결단 필요한 때
COP30의 회의장에서 들려오는 느슨한 약속보다 각 지역의 공동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작은 행동들이 더 큰 힘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말의 핵심은 ‘태도’다.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 이를 통해 인류는 다음 세대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다.
우리는 기후위기를 해결하지 못할 높은 가능성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행동을 멈출 이유는 없다. 오늘 사과나무는 심어야 한다. 인간은 결과가 아니라 태도로 평가받는 존재다. 이제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문명의 속도를 늦추고 욕망의 방향을 다시 정렬하려는 실질적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