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당국 내놓은 3가지 ‘달러수급 조정대책’ 효과 있을까
외환보유액 넘어선 국민연금 해외자산 … 4자협의체에서 투자방식 논의
개인 해외투자 급증에 환율 저지선 쌓는다 … 마땅한 촉진방안 없어 고심
강달러에 수출대기업도 달러보유 확대 … “근본해결책은 경제체력 강화”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에 육박하자 외환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고환율 상황이 굳어지면 결국 물가상승과 민생 압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근본대책은 우리 기업과 경제체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길밖에 없다는 게 정부와 전문가 진단이다. 정부가 인공지능(AI) 중심의 초혁신경제를 핵심 경제정책 기조로 들고 나온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문제는 ‘경제체질 개선’이 성과를 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외환당국 관계자는 27일 “고환율 대응을 위해서는 단기처방과 중장기구조개혁을 병행해야 한다. 근본대책을 내놓겠다면서 당장 물가와 민생에 악영향을 주는 시장상황에 눈감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최근 외환당국의 움직을 보면 단기처방의 종류는 크게 3갈래로 압축된다. 규모로는 글로벌 외환투자자가 된 국민연금의 투자방식을 수익률과 외환시장 안정성을 모두 충족하도록 조율하는 방안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기획재정부·복지부·한국은행·국민연금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를 가동했다.
또 다른 방안은 수출대기업이 보유한 달러를 내놓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올해 들어 기업들은 당분간 환율이 오를 것으로 판단하고 달러 보유 규모를 계속 늘리고 있다. 마지막 방안은 급증한 서학개미(개인 해외주식 투자자)의 투자가 가급적 외환시장에 영향을 덜 주도록 미세조정하는 방안이다.
◆수익률·시장안정 절충점 있을까 = 현재 외환시장의 가장 ‘큰 손’은 국민연금이다. 올해 8월 말 기준 해외주식 486조원, 해외채권 94조원, 대체투자 214조원 중 해외 비중을 포함해 전체 기금 1322조원 중 해외 자산은 최대 60%로 추산된다. 사실상 지난달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액 4288억2000만달러(26일 환율 기준 630조8000억원)을 웃도는 규모다.
국민연금이 수익률을 위해 지난해부터 해외투자를 크게 늘린 상황이 세계적 달러 강세 기류와 맞물려 우리 돈값(원화가치)의 하락을 촉진하고 있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전날 기자간담회를 열어 “국민연금의 수익성과 외환시장 안정을 조화하기 위해 국민연금 ‘뉴 프레임워크’ 구축을 위한 논의를 개시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사정에서다. 국민연금의 장기적인 운용 체계 개편과 더불어 단기적인 외환수급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방침으로 받아들여진다.
구 부총리는 “환율 상승에 대한 일시적 방편으로 연금을 동원하는 목적이 전혀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도 외환수급 상황과 국민연금의 해외자산 배분을 함께 점검하겠다는 취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외환시장의 변동성이 지나치게 확대되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도 했다.
4자 협의체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급등한 환율을 안정시키고, 중장기적으로는 국민연금의 막대한 해외투자가 향후 외환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운용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방침으로 풀이된다. 국민연금이 향후 연금 지급 시기에 대규모 해외자산을 회수할 때 나타날 수 있는 환율 불안도 장기적 관점에서 관리하겠다는 뜻이다.
다만 실제 국민연금의 투자 수익률과 외환시장 안정성이 양립할 수 있는지는 더 두고봐야 할 문제다. 야당은 이미 “정부가 환율방어를 위해 국민들의 노후대비자금을 손대고 있다”며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다.
◆개인 보유 외화자산도 급증세 = 미국 등 해외증권시장의 수익률이 높아지면서 개인투자자들이 대거 해외시장으로 돌아선 점도 외환수급을 어렵게 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101억달러(약 14조8700억원)이었던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 순매수는 올해 들어 287억달러(약 42조2600억원)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달에만 68억달러를 순매수하며 역대 최대 월간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는 지난달 무역수지 흑자 60억달러보다 큰 규모다. 무역수지는 상품 수출입을 통해 한국이 벌어들인 외화를 말한다. 이달에도 24일까지 이미 48억달러어치를 사들였다. 이런 흐름이 원화 약세를 압박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해외투자 여부는 개인 투자자의 선택 문제여서 정부가 개입하기 어렵다. 다만 외환당국은 증권사의 통합증거금 시스템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주요 증권사들은 해외주식 결제 수요를 매일 오전 9시쯤 동시에 환전 주문을 낸다. 하루 동안 고객이 사고판 외화 거래를 밤사이 통합해 정리한 뒤, 부족한 금액만 외환시장 개장 직후에 일괄 매수하는 방식이다.
외환당국은 이 구조를 장 초반 환율을 급격하게 끌어올리는 ‘9시 쏠림’의 핵심 요인으로 보고 있다. 정부는 지난 21일 주요 증권사를 만나 하루 평균환율(MAR)로 정산하거나, 주문 즉시 환전으로 전환하는 방식을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증권사들은 “수년간 시스템이 이 방식에 맞춰져 있어 당장 바꾸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는 후문이다.
◆대기업에 달러 공급 요청했지만 = 아울러 정부는 기업이 보유한 외화를 시중에 공급할 방안도 검토 중이다. 기업의 원화 환전을 지원하기 위해 기업의 달러 거래를 대행하는 은행의 달러 중개 거래 한도를 늘려주는 방안이 검토 대상에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 18일 구윤철 부총리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기아 등 5개 수출기업 경영진과 만난 자리에서 “외화 수급 개선을 위해 긴밀히 협조해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달러로 받은 수출 대금을 원화로 환전해달라는 취지다.
기업의 외화예금은 최근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기업 외화예금은 871억2000만달러 수준이었다. 하지만 올해 9월 922억6000만달러까지 급증했다. 기업이 수출대금을 달러로 받은 뒤 환전을 하지 않고 있어서다. 하지만 환율 변동성에 따른 위험을 방어하기 위해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이 선뜻 달러 매도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달러값은 오르고 원화 가치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정부 일각에서는 ‘자본 리쇼어링’ 등 기존 정책 확대방안도 거론된다. ‘자본 리쇼어링’은 해외 자회사가 거둔 소득을 국내로 들여오면 세제혜택을 주는 것을 말한다.
앞서 외환당국은 지난 14일에도 주요 수출 대기업을 불러 환율 상황을 점검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한화오션·HD한국조선해양 등 주요 수출기업 재무담당자들이 참석해, 달러를 시장에 조금 더 내놓거나 환전 시점을 조정할 수 있는지 여부를 논의했다. 하지만 업계 반응은 시원찮다는 후문이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환율 불확실성이 커 달러를 쉽게 팔기 어렵다. 정부 요청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협조해야 하겠지만 큰 변화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