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영·독·불’ 몰락을 이민자 탓으로 돌리는 유럽의 민낯

2025-11-28 13:00:01 게재

‘영·독·불’은 전통적으로 유럽 대표 3국을 지칭하는 용어다. 우리 대통령의 유럽 순방도 영·독·불 위주로 검토하는 것이 당연시되곤 했다. 이 3국이 요즘 맥을 못 추고 있다. 영국은 유럽연합(EU) 탈퇴 후 5년 내내 내리막길이고 독일은 마이너스 성장의 수렁에 빠져 시름하고 있다.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적자와 사회불안 등 총체적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는 중이다. 세 나라 모두 반이민 정서가 격화해 어려운 경제상황에 대한 분풀이를 이민자들에게 하고 있다.

지난 9월 프랑스에서는 ‘모든 것을 가로막자(Bloquons tout)’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100만여명이 참가한 ‘국가마비운동’ 시위가 벌어졌다. 나랏빚이 1초에 5000유로(약 825만원)씩 늘어날 정도로 심각한 재정난에 처하자 정부가 재정적자 감소를 위해 내놓은 긴축예산안이 의회 불신임에 막혀 2년 사이 총리가 6번이나 바뀌는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위대는 국가재정파탄이 정부의 무분별한 이민자 수용과 구식민지 아프리카 지원 비용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프랑스 국가 부채율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114.1%로 EU가 정한 100%를 크게 웃돈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지는 EU 내 프랑스의 GDP 비율이 15%, 국가부채는 20%인 상황으로 프랑스의 재정위기는 곧바로 유럽 전체로 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프랑스는 매년 국가부채 이자를 갚는 데만 670억유로(약 110조원)가 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제신용평가사들도 프랑스 신용등급을 강등하고 나섰다.

니콜라 세대의 좌절, 중산층 붕괴 신호탄

벼랑 끝에 몰린 프랑스 사회의 핫이슈로 떠오른 표현이 ‘돈 내는 니콜라(C`est Nicolas qui paie)’다. 니콜라가 세금독박을 써서 등골이 휜다는 의미다. 니콜라는 프랑스 30~40대 남성에게 흔한 이름으로 자크나 베르나르 같은 베이비붐 세대 이름과 차별화된다. 1980년 한해에만 2만1803명의 니콜라가 출생신고를 했을 정도로 당시 인기 있는 이름이었다. 여기서의 니콜라는 1980년대생 백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름 사회적 성공을 이룬 착실한 중산층 근로자를 상징한다.

프랑스를 떠받치고 있는 니콜라들은 월급의 거의 절반을 사회보장비를 비롯한 각종 세금으로 내고 있다. 반토막 난 월급에서 월세와 공공요금을 내고 나면 겨우 먹고살기 빠듯할 정도다. 국가 경쟁력의 중추이자 사회를 지탱하는 힘인 중산층 세대가 결국 온 집안을 먹여 살리느라 정작 자신은 생활고에 찌든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밈(meme)에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는 30대 직장인 니콜라가 70대 노부부(자크와 샹탈)의 크루즈 여행, 20대 아랍계 이민자(카림)의 사회보장, 아프리카 개발원조까지 모조리 떠안고 있는 풍자로 등장했다. 처음엔 극우적이고 인종차별적 뉘앙스가 담겼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지금은 프랑스 젊은이들의 불만을 집약한 문구로 자리잡았다.

니콜라들은 단 한푼도 세금을 낸 적이 없는 이민자들의 사회보장비까지 떠안고 있다는 불합리성에 분노한다. 극우정당들은 이런 분노에 기름을 붓는다. 이민 비용으로 연간 500억유로(약 82조원)가 든다는 주장을 앞세워 반이민 정서를 부채질한다.

더 큰 문제는 프랑스 사회보장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이다. 프랑스 65세 이상 노인의 평균 연금소득이 생산가능인구의 소득보다 높을 정도로 사회보장이 윤택하다 보니 국가가 빚더미에 앉게 된 상황인데도 연금개혁은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저항한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는 외면한 채 재정파탄의 원인을 이민자들에게만 돌리는 것이다.

이민자 희생삼아 극우 포퓰리즘의 부상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극우정당 지지율이 1위로 나타났다. 극우정당들은 더욱 선동적인 포퓰리즘으로 이 모든 경제·사회적 위기의 화살을 이민자들에게 돌리고 있다.

프랑스 지지율 1위 정당인 극우파 국가연합당(RN)은 이민자들이 공화국정신을 침해하고 선량한 노동자와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린다며 성난 민심을 자극해 반이민·반무슬림 선동에 앞장서고 있다. 유럽의 자부심이던 포용적 이민정책과 문화적 다양성도 결국 배 부를 때 이야기일 뿐 정작 재정파탄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이민자들을 배척하고 나선 것이다. 식민지배 착취에 대한 반성을 운운하던 지성과 양심은 온데간데없다.

이런 추세 속에 유럽 국가들은 이민자 단속은 물론 국경통제도 강화하고 있어 EU의 상징인 ‘솅겐조약’마저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식 배타적 포퓰리즘이 대서양 너머 유럽까지 번지면서 글로벌 거버넌스마저 위협받고 있다.

유복렬 전 카메룬대사 프랑스 캉대학교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