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 빈자리’ 파고드는 글로벌사우스 파워
남아공 G20, 미·중 정상 불참에도 정상선언 채택 … “다자주의 승리” 평가
한 인류학자가 아프리카 한 부족의 아이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시켰다. 멀찍이 과일 바구니를 하나 놓아 두었다. 과일 바구니까지 가장 먼저 달려가는 아이가 이를 독차지하도록 했다.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누구도 먼저 뛰어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란히 손을 잡고 달렸다. 함께 결승점에 도착한 아이들은 사이좋게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학자는 놀란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왜 아무도 혼자 달리지 않았지?”
“우분투(Ubuntu)! 우리가 있어야 내가 있으니까요.”
아프리카 반투족 말인 ‘우분투’는 아프리카 공동체의 연대와 공생, 배려를 담고 있다. 또 다른 아프리카 속담인 “함께 가야 멀리 갈 수 있다”는 말과도 통하는 말이다.
“우분투 정신으로 함께 번영”
세계 40여개국 정상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우분투’를 결의했다. 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열린 G20회의에서 정상들은 “우리는 우분투의 정신 속에서, 개별 국가가 고립된 채로는 번영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다”고 선언했다.
유명무실한 협의체라는 평가를 받아온 G20회의가 정상선언을 채택했다. G20회의 첫날인 22일(현지시간) 122개 항으로 이뤄진 ‘G20 남아공 정상선언’이 공개됐다. G20정상들은 선언문을 통해 “우리는 국가 간 글로벌 공동체로서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며 다자협력, 거시정책 공조,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과 연대를 통해 단 한사람도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한다”고 다짐했다.
G20 정상들은 특히 △공정한 에너지 전환을 위한 금융 동원 △포용적 성장과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핵심광물 활용 △저소득국가의 부채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한 행동 등 회원국 간 의견이 갈리는 의제들까지 조율해 정상선언문에 담았다.
“G20은 죽었다!” 한동안 G20은 이런 평가를 받고는 했다. 최근 여러 해 동안 G20은 변변한 합의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미중 전략경쟁과 다자주의 위축, 공급망 재편, 개발도상국 의제의 약화 등으로 G20은 나라간 이해가 충돌하는 각축의 무대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번 남아공 G20회의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는 기대난망이었다. 무엇보다도 주요2개국(G2)인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불참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 정상도 빠졌다.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중 세 나라 정상이 빠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계적인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영국 왕립 국제문제연구소(일명 채텀하우스)의 크리스토퍼 반돔(Christopher Vandome) 선임연구원은 남아공 G20회의 개막 직전인 20일 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한 ‘분열된 세계에서 포용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남아공 G20’이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불참을 선언한 상황에서,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다자주의에 대한 헌신이 흔들리는 가운데, 이번 정상회의가 대규모 연대를 보여주거나 결정적인 조치를 이끌어낼 가능성은 크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 훼방 안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번 G20 회의의 주제인 연대(solidarity), 평등(equality),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에 대해 큰 거부감을 나타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남아공정부가 백인 소수 인구를 부당하게 대우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회의를 보이콧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훼방은 통하지 않았다. 미국은 G20회의에서 영향력 상실을 경험해야 했다. G20회의는 첫째 날에 이례적으로 정상선언 합의를 이끌어냈다. 남아공의 유력 매체인 ‘타임즈 라이브(Times Live)’는 22일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이 세계 최고 불량배의 코피를 터트렸다”면서 “트럼프의 G20 회의 방해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고 보도했다.
무슨 배짱일까? 도대체 라마포사 대통령은 무엇을 믿고 세계 최강국인 미국 대통령과 맞짱을 떴을까? 그 뒷배는 바로 글로벌사우스(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개도국 및 신흥국)였다. G2 정상이 빠진 G20회의의 빈자리를 글로벌사우스가 파고들었다. 그동안 다양한 협의체와 플랫폼을 통해 목소리를 키워온 글로벌사우스가 G20 무대에서 한목소리를 낸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글로벌사우스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글로벌사우스의 중추 국가들로 구성된 브릭스(BRICS)는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5.6%를 차지한다. BRICS의 인구는 전세계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36억여명이다. 개발도상국 130여 개국의 연대인 G77은 개발·무역·부채 등 국제 어젠다에서 글로벌사우스의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다. 이밖에 아프리카연합(AU)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 상하이협력기구(SCO), 남아시아지역협력연합(SAARC), 남미공동시장(MERCOSUR) 등 지역을 기반으로 한 협의체들도 글로벌사우스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글로벌사우스가 세계 거버넌스 개혁 견인”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3일 남아공 G20회의 폐막 직후 ‘글로벌사우스가 세계 거버넌스 개혁을 이끈다’라는 제하의 논평을 냈다. “글로벌사우스는 더 이상 국제질서의 수동적 ‘규칙 수용자(rule-taker)’로 머무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글로벌사우스는 전 지구적 거버넌스를 개선하고 발전을 견인하기 위한 집단적 세력으로 전면에 나서고 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24일 ‘미국의 반대 무릅쓴 G20 정상선언, 드문 다자주의의 승리’라는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놀라움을 표시했다. “당초 많은 이들이 G20에서 선언문 채택은 고사하고, 기후변화나 외채 부담으로 고통받는 빈국 지원 같은 의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의심했다. 그러나 남아공정부는 미국의 방해를 딛고 회원국을 결집시켜 선언문 채택에 성공했다.”
앤드루 쿠퍼 워털루대학교 석좌교수는 24일 영국 국제정책 전문 매체인 글로벌 폴리시 저널(GPJ)에 ‘남아공 G20, 트럼프의 혼란・불참・변덕 속에서 글로벌 외교의 재편을 알리다’라는 제하의 칼럼을 실었다.
쿠퍼 교수는 “이번 G20은 글로벌 외교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재편 과정을 겪고 있는지를 여러 차원에서 드러냈다”면서 “가장 분명한 변화의 신호는 아프리카를 세계 외교의 중심 무대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이번 G20에서는 글로벌사우스만 참여하는 협의체들을 일정 부분 확보했다는 점이 주목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브릭스 플러스(BRICS+) 그룹의 대표단이 대거 참석했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 초청국으로 참여하면서 브릭스 플러스의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존재감은 인도·브라질·남아공 협력체인 IBSA가 보여주었다. 모디 인도 총리와 룰라 브라질 대통령,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긴밀한 협력을 약속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중간지대 위치한 한국의 선택은
이번 남아공 G20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도 주목을 받은 정상 중 하나였다. 대한민국은 글로벌사우스에서 글로벌노스(주로 북반구에 위치한 선진국 그룹)로 이동한 세계 유일무이의 나라다. 이 대통령은 그런 독특한 위상을 지닌 나라의 지도자답게 G20회의 세션에서 글로벌사우스와 글로벌노스 간 연대와 협력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던졌다.
이 대통령은 다자주의를 줄곧 강조하고 ‘모두를 위한 공정한 미래’를 제안했다. 특히 핵심광물 공급망의 공정성과 글로벌 AI 기본사회, 포용성장 등 함께 잘사는 세계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앞으로도 개도국에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회원국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세계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다. G2의 장악력이 약해진 틈을 파고드는 글로벌사우스를 강대국들이 지켜만 보고 있을까? 과연 글로벌사우스와 글로벌노스가 ‘우분투 정신’으로 함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사는 세상은 성경에나 나오는 말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글로벌사우스와 글로벌노스 중간 쯤에 있는 대한민국이 ‘우분투 매개자’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K-팝과 K-무비, K-뷰티, K-푸드에 이어 K-외교가 세상에 이로움을 주는 대한민국의 새 브랜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