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AI 시대 노동자 보호
유럽연합, AI법 제정으로 사용 규제와 노동권 보호
2024년 8월 세계 최초 AI법 발효, AI 혁신 지원하면서도 사회적 위험 최소화 … 노동의 형태, labour에서 work로 이동
노동의 존엄이 인정되지 않았던 과거, 노동자들은 자신이 노동자로 인식되는 것을 꺼렸다. 자녀에게 노동자라는 이름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땀을 흘려 일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는가? 이런 의심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인공지능(AI) 시대가 오고 있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ennth)는 AI에 의해 다시금 빼앗길 노동의 존엄을 ‘인정투쟁’ 이론으로 경고한다.
독일과 유럽연합(EU)은 지금 AI 시대의 새로운 노동규칙을 만들기에 바쁘다. 산업재해 4.0, 평의회와 공동결정 4.0강화, 재택근로법, 연방차별금지청의 권고와 일반평등대우법, 유럽인공지능법 등 법제 정비에 나섰다. 이들은 AI에 의한 인간 노동의 대체를 일자리 상실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경제적 위기를 넘어 ‘노동의 존엄성 훼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위기라고 여긴다. 독일 사례 연구, 한국 사회 맞춤형으로 정책을 개발하는 독일정치경제연구소는 올해 10주년을 맞이해 연구진과 연구네트워크들이 독일과 EU의 법제 정비는 어디까지 왔는지 살폈다.
인공지능(AI)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노동시장에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2024년 8월 세계 최초로 AI법을 발효했다. 이 법은 AI의 안전성에 대한 규제법이지만 노동보호를 명백히 규정한다. AI 기술은 단순히 효율성을 높이는 수준을 넘어 산업의 경쟁 구도와 경제성장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기업은 AI를 활용해 환경 영향, 일자리 창출, 납세 등 사회적 가치를 정량화해 기업 경영의 기준을 새롭게 정의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노동은 데이터 분석, 창의적 문제 해결, 윤리적 판단능력 등 인간 고유 역량을 요구하는 직무가 늘어나면서 노동시장의 구조적 변화가 불가피해진다. AI의 등장으로 개인정보 보호, 차별 방지, 민주적 가치 보장 같은 제도적 장치가 사회적 신뢰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커진다.
◆AI 규제강도, 차등적용 관리체계 마련 = EU 집행위원회는 2021년 AI법을 제안하며 위험 기반 접근을 통해 규제 강도를 차등 적용하는 방식으로 관리체계를 마련했다. 그리고 2024년 3월 EU의회에서 AI법안을 최종적으로 통과시키면서 AI 기술의 활용과 규제에 관한 세계 최초의 포괄적 법적 틀을 마련했다. 이 법안의 주요내용은 첫째, 위험 기반 규제체계다.
모든 AI 시스템을 위험 수준에 따라 △사용금지 △고위험 △제한적 위험 △저위험으로 분류하고 각 범주에 맞는 규제를 적용하도록 했다.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시스템은 원천적으로 금지되며 의료·교통·교육·고용 등 고위험 분야에서 사용되는 AI는 엄격한 안전성 투명성 책임성 요건을 충족하도록 했다.
둘째, 투명성과 설명 가능성 의무를 강화했다. 당초 입법안이 강조한 바 인간과 직접 상호작용하는 AI는 자신이 AI임을 알리도록 했다.
셋째, 집행 및 감독 구조를 마련했다. 넷째, 국제적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EU 내 법인이 없더라도 EU 시장에서 AI를 제공하거나 활용하는 기업은 모두 이 법의 적용을 받도록 했다. 공급자뿐 아니라 배포자 수입업자 유통업자까지 규제 대상에 포함시켜 책임을 강화했다. 이 AI법은 AI의 혁신을 지원하면서도 사회적 위험을 최소화하고 균형을 추구하는 법적 틀로서 시민의 기본권 보호와 사회적 신뢰 확보, 그리고 글로벌 규제 표준 선도를 목표로 하고 있다. AI법은 2024년 5월 유럽이사회가 승인하고 8월 1일 공식 발효됐으며 2025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AI, 근로조건에 영향 끼치면 정보공개해야 = AI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AI가 고용과정이나 직무평가에 활용될 때 발생할 수 있는 차별과 불공정을 방지하기 위한 규제를 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EU AI법은 ‘금지된 AI’에는 노동조합 가입 여부 등을 확인하거나 추론하기 위한 시스템을 포함했다. ‘고위험 AI’에는 채용 승진 성과 및 근태에 대한 모니터링 및 평가와 관련된 시스템이 포함됐다. 이처럼 EU는 AI법을 통해 금지된 AI와 고위험 AI의 사용을 규제하고 노동권을 보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EU AI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AI를 도입할 때 이것이 노동자의 역할이나 근무조건에 영향을 미칠 경우 노조나 노조 대표와 조기에 협의하고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이 단체교섭을 통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AI에 대한 반발과 공존 모색 = 하지만 AI도입에 따른 노동의 상황이 그리 녹록치 않아 보인다. 이는 독일도 마찬가지이다.
‘챗GPT’ 등 생성형 AI가 등장하자 독일의 사진작가 언론인 일러스트레이터(삽화가) 등을 포함한 14만명 작가와 공연자를 대표하는 42개 협회 및 노조가 AI를 규제하라는 서한을 EU 의원들에게 보냈다.
올해 7월에는 베를린 틱톡 독일 본사 앞에서 60여명의 직원과 공공서비스노조인 베르디(Ver.di) 소속 조합원들이 집회를 열고 고용보장을 요구했다. 틱톡이 법에 어긋나는 영상을 걸러내는 직원을 AI로 대체한 것에 반발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AI와의 공존을 추진하는 모습도 발견되고 있다. 유럽 최대 산업별 노조인 독일 IG메탈의 크리스티안 베너 의장은 인터뷰를 통해 ‘AI와의 공존’을 언급했다. IG메탈은 AI 도입에 대한 노조원의 불안을 해소하고 AI 리터러시(문해력)를 높이기 위해서 한화로 약 2300억원을 들여 챗GPT 등 AI 활용법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큰 파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올라타야 = 현대 독일 철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신간 ‘모두를 위한 자유’를 통해 생존을 위한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의미를 창출하며 살아가는 ‘의미 사회’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지난달 6일 서울에서 독일 연방직업교육연구소와 한국 직업능력연구원의 협력 25주년 기념으로 ‘글로벌 인재포럼 2025’을 열었다. 게오르크 슈미트 주한 독일 대사는 이 포럼에서 “독일어로 직업(Beruf)이 ‘소명’을 의미하듯 일이 자아실현의 수단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어 레이버(labour)에 해당하는 중세의 라보르는 저급한 고된 노동을 의미했고 의사나 작가처럼 전문적이고 정신적으로 까다로운 노동은 워크(work)로 분류했다.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노동은 ‘labour’로, 자아실현의 수단으로서의 노동은 ‘work’로 본 것이다. AI의 시대를 피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독일의 노동자들은 초반에는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다가 점차 이를 수용하고 오히려 노동의 질을 높이려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즉 노동의 형태가 labour에서 work로 이동하고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상황이 쉽지는 않겠지만 향후 우리가 취해야 할 방향성은 분명해 보인다. 큰 파도가 온다면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파도 위에 올라타야 할 것이다.
홍선기
헌법재판소 헌법연구위원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독일정치경제연구소 공법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