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그플레이션 속 위험한 유동성 파티
2026년 미국경제, 유일한 기대는 AI 분야 … 문제는 현실보다 기대 앞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1일 발표한 경제전망보고서는 올해 세계경제에 대해 ‘회복력 있는 성장이 돋보였으나 취약성도 함께 증가했다’고 평가했다. 트럼프행정부가 촉발한 무역장벽 강화로 정책 불확실성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글로벌경제는 예상보다 높은 회복력을 보였지만, 회복 이면에는 위기로 번질 수 있는 균열이 동시에 확대되고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회복력 보였지만 취약성 증가한 세계경제
이러한 이중적 경향이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난 곳은 바로 미국이다. 겉으로 보자면 미국은 2025년 전세계를 이끄는 거의 유일한 성장엔진처럼 보였다. 연말까지 예상되는 미국 실질 GDP 성장률은 2%로 OECD 6월 전망치였던 1.6%보다 0.4%p 상향 조정되었을 만큼 주요 선진국 가운데 가장 견조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러나 미국경제를 떠받치는 각종 지표들은 미국 경제의 구조적 흔들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우선 위기는 노동시장에서 가장 먼저 감지됐다. 올해 10월 미국 구인건수는 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해 팬데믹 이후 고공 행진하던 노동 수요가 빠르게 식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노동 공급 자체도 급격히 줄고 있다는 점이다. 강경한 이민정책과 불법체류자에 대한 대규모 추방에 따라 올해 미국은 60여년 만에 처음으로 5330만명에서 5190만명으로 100만 이상 국내 체류 이민자수가 줄었다.
이에 대해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노동력의 공급과 수요가 동시에 줄어드는 이상한 균형이 나타나고 있다’며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수치만 놓고 본다면, 고용시장은 실업률이 높지 않아 여전히 견조하다 볼 수도 있지만 실상 이는 고용시장이 얼어붙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신호에 가까운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트럼프행정부가 그동안 주장해온 ‘무역장벽을 쌓으면 글로벌 기업들이 줄지어 미국에 유입되고 해외로 빠져나간 생산기지들이 미국으로 되돌아 와, 일자리도 자연스럽게 늘어난다’는 가설이 현재까지 어떠한 성과도 보여주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조업 일자리가 구조적으로 줄어든 것은 이미 오랜 기간 누적된 결과이고,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가 이를 되돌릴 만큼의 힘을 갖고 있는지도 점점 의문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이 물가는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관세인상은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에 반영되는데, OECD는 이번 물가상승이 단발성 충격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된 흐름일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임금상승률은 둔화하는데 물가는 목표치인 2%를 다시 넘어설 조짐을 보이면서 가계의 가처분소득은 계속 감소하고 있다. 고용 둔화와 노동공급 감소, 물가 재상승이라는 조합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전형적인 현상으로 2025년의 미국경제는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단계에 이른 것이다.
AI투자에 전적으로 의존한 성장의 한계
올해 미국경제가 보여준 유일한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GDP성장 이면에도 취약점은 존재한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미국 실질 GDP 성장률은 1.1%였지만 이는 AI 연구개발, 데이터센터 건설, 클라우드 인프라 확충, 반도체 설비 증설 등 AI 관련 투자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경제의 기초체력이 고르게 강화된 것이 아니라 특정 산업군에만 불균형하게 쏠린 성장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기형적 성장의 배경에는 이번에도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 트럼프행정부는 집권 후 불과 몇달 사이 실효관세율을 2.5%에서 14%로 끌어올리며 무역환경을 급격히 뒤흔들었다. 그 결과 관세는 소비자물가를 밀어 올렸을 뿐 아니라 제조업 생태계를 오히려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보호무역이 침체된 미국 제조업을 살릴 것이라는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관세로 인해 원재료가격이 상승했고 기업 비용이 증가하면서 제조업이 더 큰 부담만 떠안게 됐다.
40% 아래로 떨어진 트럼프 지지율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40% 아래로 떨어지고 각종 보궐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득세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정치적 요인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가계 및 기업의 체감경기가 빠르게 나빠진 것이 현재 지지율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6년을 앞둔 미국경제가 유일하게 기대를 걸고 있는 분야가 여전히 AI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문제는 이 기대가 이미 현실보다 한참 앞서가고 있다는 점이다. S&P500의 경기조정 PER는 어느새 닷컴버블 정점과 겹쳐 보이는 수준까지 치솟았고, 시장 곳곳에서는 과열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상징적 장면도 이어지고 있다. 영화 ‘빅쇼트’의 실제 인물로 유명한 마이클 버리는 최근 테슬라 주식의 거품론을 주장하며 엔비디아 등 주요 AI 종목에 대한 공매도 포지션을 드러냈다.
영국 연금 기금들 역시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AI 중심의 미국 주식 비중을 줄이는 중이다. 더 나아가 JP모건은 지금의 AI 투자 규모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매년 6500억달러 이상의 AI 관련 매출이 필요하다고 보았는데, 이는 아이폰 사용자 한 명이 매년 400달러를 AI 서비스에 써야 가능한 계산이어서 사실상 비현실적인 가정이다.
AI 산업의 성공을 그저 맹신하기에는 AI 버블에 대한 우려가 만만찮은 것이 지금의 객관적이고도 냉혹한 현실인 것이다.
‘AI버블론’ 제기한 빅쇼트의 마이클 버리
이런 상황에서 행여나 AI 버블이 결국 꺼지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이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AI 버블이 붕괴하면 미국 가계의 순자산은 약 8% 감소하고 소비는 GDP 대비 1.6%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2025년 기준 미국 가계 자산 중 주식 비중이 40%가 넘고, 미국경제 소비가 성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에 이르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결과다.
이러한 AI버블 붕괴만으로도 경기침체의 가능성은 매우 높아지는데 설상가상으로 노동시장 둔화, 관세로 인한 물가상승, 임금 둔화가 이미 겹쳐진 상태라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미국 경제에 미칠 충격은 훨씬 클 수 있다. 미국 가계자산 감소와 소비둔화는 유럽 중국 등 아시아를 넘어 세계 경제 전체로 일파만파 번져 결국 과거 몇 차례 경험했던 거품이 꺼진 이후의 경제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가 2026년에 당장 벌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경기둔화와 인플레이션이라는 가장 불리한 조합을 마주하면서도 정치적 승리를 위해 금리인하, 양적완화(QE) 재가동, 더 나아가 셧다운의 아픈 경험 속에서도 출혈적 재정지출이라는 포퓰리즘 카드를 꺼내 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년 5월 임기가 종료되는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 자리를 트럼프 대통령 측근인 케빈 헤셋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이 차지하게 된다면 중간선거 이전까지의 위험한 유동성 파티는 순조롭게 이어질 것이다. AI 산업이 과연 어느 정도 실체를 갖는지와는 무관하게 필요 이상으로 남아도는 시중의 돈은 증시로 빨려 들어갈 것이며 남은 돈은 가상자산과 금 부동산 등 다양한 자산시장으로까지 스며들 것이다.
위태로운 균형점에 서 있는 미국경제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미국경제는 지금 두개의 전혀 다른 미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하나는 AI가 실물경제로 본격 확산되면서 생산성을 끌어올리고 경기둔화를 일정 수준 완충해 주는 길이고, 또 다른 하나는 AI 과열이 결국 버블붕괴로 이어지고 그 충격이 미국경제 내부의 취약한 고리인 노동 소비 재정 관세 정치와 연결되며 깊은 침체로 빠져드는 길이다.
OECD는 내년 미국경제 성장률이 1.7%로 일시 둔화되었다가 2027년에는 1.9%로 다시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적 취약성을 보면 현재와 같은 스태그플레이션 속 유동성 파티가 얼마나 오래갈지, 버블붕괴에 따른 경제위기 우려 없이 완만한 경제회복 커브를 그릴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요컨대 2026년 미국경제는 성장의 새 엔진을 찾을지, 아니면 과열된 희망의 그림자 속으로 미끄러질지 위태로운 균형점 위에 서 있다.